제49집: 시대적인 우리의 위치 1971년 10월 2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33 Search Speeches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그러면 통일교회 문선생은 어떠한 사람이냐? 봄날이 오기 바쁘게 여름날이 오고 여름날이 오기 바쁘게 가을날이 오고, 가을날이 오기 바쁘게 겨울날이 오는 것이 천리의 원칙이거늘 봄을 맞이했다고 즐거워하기 보다는 여름을 맞기에 부끄럽지 않는 자세를 어떻게 남기느냐 하는 데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것이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책임자의 소신이 안 되어 가지고는 이 단체는 가다가 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안일과 영광의 터전을 꿈꾸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보다는 내일의 행복의 터전을 남기기 위해 수난길을 자기의 필생의 운명으로 알고 가야 될 것입니다.

여름날이 오기 전에 결실을 맞아 남보다 일찍 거두어져 가지고 주인의 환갑 잔칫날 진설하는 상 위에 귀한 열매로서 바쳐질 수 있다면 그 때가 여름절기가 되어도 좋고 가을절기가 되어도 좋은 것입니다. 잔칫날이 되기 전에 거두어질 수 있는 모습이 되면 완전한 가을날에 어디서든지 구할 수 있는 결실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은 가을절기에 완숙된 결실의 몇만 배의 가치로서 하늘 앞에 바쳐질 것이 아니냐, 봄에 태어나 가지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결실하는 것을 한 계절 동안에 다 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내적인 저력을 가지고 생활환경을 개척하고, 그 환경의 여건을 타파할 수 있는 힘의 자주성을 가지고 가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신념과 사상을 가지고 나가는 통일교회의 지도자라면 그 단체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봄은 짧을 것이요, 여름도 짧을 것이요, 가을도 짧을 것이 아니냐….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의 한 생애를 두고 보면 소년시대가 있을 것이고 청년시대가 있을 것이고 장년시대가 있을 것이고 노년시대가 있을 것이거늘, 그러한 책임수행을 추구하는 어떤 사림이 있다 할진대 소년시대가 길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짧기를 바랄 것입니다. 장년시대도 짧기를 바라는 것이고, 노년시대도 짧기를 바랄 것이 아니냐. 7,80년 생애를 중심삼고 완성을 바라는 것보다 7,8년의 한 시대권을 중심삼고 완성을 바라려니, 일년 동안에도 환란풍파를 겪어야 하나의 결실을 맺는 것을 우리가 보거늘, 얼마나 풍상이 많겠습니까?

이런 세계사적인 하나의 완숙된 결실을 고대하는 모습이 있다 할진대, 그가 평안한 입장에서 소일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이룰 수 있겠느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방으로 부딪히라는 것입니다. 봄날이면 봄날, 여름날이면 여름날, 가을날이면 가을날, 생명의 여력과 내적 권한에 있어서 투쟁하여 여력이 충만할 수 있는 자리에서 가는 길 앞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아무리 농토가 크고 동산이 세계로 연하였다 하더라도 그 동산 가운데 그런 결실이 있다 하면, 주인은 그곳으로 발걸음을 더듬어 그 결실된 모습을 바라보고 그 자리에 기대를 가질 것이 아니냐. 그런 시간을 가진 단체라면 그 단체는 고독한 단체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고독한 사람일 것입니다. 횡적으로는 지극히 고독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독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사계절에 해야 할 것을 한 계절권내에서 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통일교회의 탕감복귀라는 내용이 아니냐. 탕감조건을 통하여 시대적 사명에 적응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여러분들은 필생 노정에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자기의 생애를 피력할 수 있는 날을 몇 날이나 가졌느냐? 하루도 춘하추동의 계절을 대신한 것입니다. 일년을 가지고 세계사적인 봄절기를 대신할 수 있고, 여름절기를 대신할 수 있고, 가을절기를 대신할 수 있고, 겨울절기를 대신할 수 있는 최고의 한해를 갖고야 쓰러지겠다 하는 결심을 해보았느냐?

`오늘날 찾아오는 그런 한해의 봄날은 인류역사의 비운의 봄날을 능가할 수 있는 탕감의 봄이오니 봄이여 찾아오소서. 인류역사의 여름절기를 맞지 못하였던 것을 탕감할 수 있는 내 일대에 세계사적인 승리의 결실로서 가질 수 있는 여름절기여 찾아오소서. 가을절기여 찾아오소서. 겨울절기여 찾아오소서' 하며 겨울절기를 맞이하여 한 금을 긋게 될 때는 내 일대에 봄절기를 맞이할 수 있는 운세가 올 것이 아니냐.

거기에는 찬바람이 몰아치더라도 하나님이 옹호하는 온상에서 하나의 결실로서 자랄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탕감적인 생활권내에 있을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필시 우리 앞에 그런 길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기대했던 길이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들은 그것을 일년에 못 하겠으면 4년동안에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4년 동안에 안 되거든 40년 동안에라도 해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동서 사방을 중심삼고 일년이 천년 같고 천년이 일년 같다는 하늘의 계수법을 우리가 이때 활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한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위치를 갖춘 적이 있느냐? `내 일생에 있어서 요때는 뺄 수 없다. 잘먹고 잘살고 내 마음대로 하고, 금년에는 운이 트여서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로구만' 하면서 사람들과 더불어 큰 웃음을 웃고 천지가 진동하게끔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 일생에 있어서 추억의 해요, 기념의 해가 될 수 있느냐? 아닙니다. 오히려 공적인 입장을 생각해서 사지(四肢)가 사방으로 찢어지고 긁혀 가지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기를, `이것이 전부다. 이제 내 목숨이 최후의 맞이 하는구나' 하는 비극이 엇갈리는 자리에서도, 생사의 기로가 교차되는 순간에 있어서도 `나는 없다' 하는 그 경지를 다지고, `있다 하는 그 가치의 내용은 하나님만이 결정하여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경지를 거칠 수 있는 수난의 한때와 한해를 맞으면 그것은 일생 동안 여러분이 사망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죽어갈 때는 추억의 해로서 남아질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