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집: 뜻이 원하는 길 1972년 10월 2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1 Search Speeches

가인과 아벨의 차이

그렇기 때문에 가인 아벨의 문제는 언제나 남아지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둘 다 똑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 사람 중심삼고 뜻을 설정하게 된다면 반드시 선한 사람을 중심삼아서 할 것입니다. 그 둘 가운데 조금 나은 사람이 조금 나은 분야에 해당한 아벨적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 분야가 커지면 점점 큰 아벨로서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아벨 중에 개인적인 아벨이 생겨나는 것이요. 아벨 중에 가정을 대표한 아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커 가는 거라구요. 아벨 중에 종족적인 아벨이 있는 것이요, 아벨 중에 국가적인 아벨이 있는 것이요, 세계적인 아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반대적인 면에서 개인이 생겨나는 것이요, 반대적인 가정이 생겨나는 것이요, 반대적인 민족이 생겨나는 것이요, 반대적인 국가가 생겨나는 것이요, 반대적인 세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이 되면 반드시 세계는 두 갈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갈래로 돼 가지고 '내가 옳다. 내가 옳다' 하는 때가 되거든 끝날인 것을 알라! 끝날인 것을 알라!

가인 아벨을 두고 보면 말이예요, 공판정에 나타나는 심판날이 가까와 오면 가까와올수록 가인은 가인대로 변명하는 것이요, 아벨은 아벨대로 변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드러낼 때가 오는 것입니다. 누가 옳으냐, 누가 그르냐 하는 문제를 가려야 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부딪치는 것입니다. 부딪치는 거예요. 그러면 부딪치는 데 가인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가인과 아벨의 성격이 어떻게 차이가 있느냐? 맞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벨이요, 치는 자리에 서는 것이 가인인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오늘날 전세계를 두고 보면, 치는 자리에 선 것이 누구냐 하면 공산세계요. 맞는 자리에 선 것이 누구냐 하면 민주세계입니다. 또, 하나의 국가에서 보게 된다면 말이예요. 하나의 민주세계를 두고 본다면 치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요. 맞는 자리에 선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자들인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이겁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비판한다 이거예요.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도리어 핍박하고 도리어 평을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비평을 받고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인 아벨을 분별하는 데 있어서는, 맞는 것은 아벨이요, 치는 것은 가인인 것입니다.

맞고 때리고 난 후에 최후에 결판이 나게 된다면 서로서로가 기진맥진 해집니다. 기진맥진해진다구요. 둘 다 끝까지 싸웠다가는 둘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건 그럴 수 없습니다. 어느 것 하나는 망하게 마련입니다. 어느 것 하나가 굴복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느 것이 굴복하게 되느냐? 어느 것이 굴복하게 되느냐? 악한 것이 먼저 굴복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악한 것은 자기가 대항을 했지만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자기가 당당히 나서서 변명하고 변호 했지만 대하고 나면, '네 이놈?' 하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기 때문에 양심의 소모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렇지만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올바른 자리에 선 사람은 반대가 심하면 심할수록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가책은 커녕 도리어 발전이 벌어집니다. 그렇지요?「예」악한 편에서 치면 칠수록 아벨은 강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치는 쪽은?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남아지는 것이요, 악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민주세계는 내가 어느 편에 섰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게 사고라구요. 내가 선한 편에 섰는지 악한 편에 섰는지,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선한 편에 선 것을 자각하는 날에는 '내 편에는 하나님이 있고 내가 선한 편에 섰으니 마음대로 쳐 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강해지는 것입니다. 치면 칠수록 우리 편은 하나님과 가까와진다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다구요. 안 그래요? 부모 앞에 있어서 잘못한 형님이 동생을 치면 칠수록 부모는 누구의 편에 서느냐? 맞는 동생의 편에 오지 말래도 오게 마련입니다.

그 원칙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느 편에 섰다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갈팡질팡하니까, 한 대 맞고 '그래 그래' 그러니까 사고지, 옳은 것을 알고 끝까지 지키고 나가게 될 때에 하나님은 내 편이 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끝까지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게 사고입니다. 아벨이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뜻을 위해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예수님도 죽을 때까지 자기의 뜻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는 나를 버리지만 나는 아버지를 안 버리겠습니다' 했습니다. 확실히 알았다구요. 나는 참된 뜻을 가졌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부딪쳐 오는 환경이, 혹은 원수들의 핍박이 가중되어 오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망하는 것이다' 이런 신념을 갖지 못한 민주세계가 돼서는 큰일입니다. 도리어 공산세계는 '이놈은 치면 망한다' 하는 신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상 적인 면에서 신념을 드높이 하고 '이놈을 치면 우리 방망이에 나가떨어진다' 이렇게 자신을 갖고 나가는 것이 공산당입니다. 이건 맞으면 으례히 망할 것인데 죽지 않는 것은 맞는 자로서 당당히 부모의 변호를 받을 수 있고, 부모의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아들의 권위를 갖고 있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못 됐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는 피폐해가고, 민주세계는 약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그냥 그대로 계승받을 수 있는 자리에 못 선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여기에서 자각해 가지고 아버지의 아들로서 당당히 섰다 하게 될 때는, 오늘날 이 공산세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세 번까지는 치는 것입니다. 한 번 치고, 두 번 치고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1차대전, 2차대전, 3차대전형을 거쳐 나가는 것입니다.

몸을 치는 시대, 그 다음에 마음을 치는 시대, 정을 치는 시대,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치는 시대, 이렇게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몸뚱이 빼앗기 싸움이라구요. 인간의 역사를 가만히 보게 되면 지금까지 전쟁은 무엇 때문에 했느냐? 땅을 빼앗기 위해 했습니다. 땅 빼앗기 싸움입니다. 땅은 몸뚱이 상징입니다. 그렇지요?「예」그 다음에는 무엇 빼앗기 싸움이냐? 그 다음에 주의 사상을 중심삼고 사람 빼앗기 싸움입니다. 그렇지요? 그 다음에는 무엇 빼앗기 싸움이냐? 누가 주인을 중심삼아 가지고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라구요.

공산당들이 지금 그 놀음 하고 있다구요. 공산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되기 위해 강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당을 사랑해라. 당을 사랑해라. 당을 사랑하는 데는 자기 여편네보다도 아들딸보다도 더 사랑해야 된다, 이렇게 돼 있지요? 그 당이 무엇이냐? 김일성이 남편이라면 당은 여자와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당은 무엇이냐 하면 김일성의 집이다 이거예요.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김일성의 집이라구요. 하나되는 것은 직계 족속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사탄세계는 그러한 자리까지 나가서, 사람을 중심삼고 한 곳으로 집중 시켜 가지고 무엇을 치느냐? 하나님을 친다 이겁니다. 하나님을 쳤지요? 「예」 몸뚱이, 마음, 사람 빼앗기 싸움, 그 다음에는 이 인간에게서 사랑을 몽땅 빼앗는다구요. 그 다음엔 하나님까지 치는 게 공산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우리 몸뚱이를 하나님편에, 우리 인류들의 마음을 하나님편에, 사상적인 면에서 인류를 포섭해서 하나님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집에 사랑을 집결시켜야 되고, 하나님을 절대로 위하고 반대할 수 없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 발전을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은 불가피한 결과가 아닐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