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집: 선의 결실을 거두라 1968년 06월 0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89 Search Speeches

지도자의 길

그런 것을 볼 때, 통일교회 문선생이 못나서 그런 일을 당했느냐! 선생님의 외모도 이만하면 못생긴 것은 아닙니다. 내가 미국이나 구라파 일대를 다녀 보았지만, 내 키가 작은 키가 아닙니다. 중키는 되지요? 동양 사람이 이만하면 어디 가도 빠지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 축에 들어가도 작지 않습니다. 남들만큼 잘나지 못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누가 본다고 해서 땀흘려 일할 필요 있습니까? 그런 일은 안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이 일은 누가 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해달라고 해서는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안 하면 안 될 공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공적인 책임을 완수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여러분을 위해서보다도 하늘을 부름을 받고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충절을 다해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선생님이 어떤 때 어느 동네에 들어가면 한 사람도 아니고 세 사람씩이나 죽어 나가빠집니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은 `아이고 우리가 급벼락을 맞은 것은 저 젊은 녀석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 녀석을 쫓아내자'고 합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쫓겨나 보기도 했습니다. 지독하지요? 왜 하필이면 나중에 죽지 않고 내가 들어갈 때 죽었을까? 선생님이 어딜 가든지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가는 곳곳마다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겠습니까? 원수의 세계에 하늘의 사람이 왔으니 그러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간첩이 내려오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두 편안해 하는가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하고 세상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지도자는 아무리 좋은 주의와 사상을 갖고 나왔다 하더라도 세상과 함께 뒤넘이치는 길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피를 토하고 매를 맞아 몸을 가눌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갔을 때에도 나는 누구를 원망해 보지 않았습니다. `이 원수를 복수해야겠다. 기어코 원수를 갚고 말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 뿌릴 때에 그렇게 뿌렸기 때문에 그렇게 거두는 것이므로,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터전 위에서 거두어 들일 수 있는 주인이 못 됩니다. 알겠어요?

통일교회 교인들, 혹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통일교회가 좋기는 좋다. 그 가르침도 좋고, 믿음도 그 가르침대로 따라서 해야 되겠지만, 그것 따라가려면 너무 비참하다. 비참해! 아이고, 너무 너무 비참해' 하며 후퇴합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움직임이 사회적으로 보면 비참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따라 나가야 됩니다. 그러지 않는 사람은 통일교인으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생애를 바쳐 이 일을 혼자서 해 나가는 것입니다. 내게는 스승도 없습니다. 친구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싸워 나오신, 몰리고 쫓기는 외로운 자리에 내가 대신 들어가고 싸워 나가겠다고 다짐하면서 나왔습니다. 그 자리는 모든 화살이 퍼부어지는 자리요, 삶고 죽음이 교차되는 자리요, 골고다를 거쳐 가야 할 탄식의 자리인 것입니다.

만일, 민주주의가 나오지 않았으면 통일교회의 가는 길이 어땠을 것인가?

선을 뿌려 오신 하나님이 거두리라고 약속하셨던 그 약조를 이루어 드리는 수확의 역군이 되기 위해서는 비참한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절정에서부터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서라도 거기에 뿌려진 선의 결실을 수확해 드리겠노라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슬피 우시며 탄식의 한을 품으시고 이 땅에서 사망의 세계를 심판할 목표를 세워 놓고 나오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슬퍼하신 그 자리에 들어가 `당신이 거두기를 원하시는 수확을 제가 거두어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가 죽은 해골의 곳이 그러한 자리였고, 아브라함 등 역대의 우리 선조들이 걸어간 그 자리 또한 하나같이 그러한 비참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자리에 들어가서 선조들을 부활의 실체로 거두어 들일 수 있고, 하나님의 내정적인 심정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권위를 갖추어야만 추수의 역군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