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집: 승리적 주관가가 되자 1964년 01월 0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52 Search Speeches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한 각오

이렇게 미루어 볼 때, 끝날에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6천년의 종말사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의 자리에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이 승리하면, 오시는 주님은 슬픔과 고통과 비참과는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런 기반을 못 닦아 놓게 될 때는, 오시는 주님은 성도를 대표하여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찾아 세우신 유대 나라가 책임 못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맛보아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알아야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탕감복귀의 조건이 세워진 자리에서 불리움을 받았다면, 여러분들은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어느 때까지 절대 복종해야 되느냐? 하나의 주권을 세워서 한 나라, 한 민족을 동원하여 타락된 생활을 칠 때까지 절대 복종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명령에 언제까지 절대 복종해야 했느냐? 가나안 칠족을 멸할 때까지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노아의 식구들도 노아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언제까지 복종해야 했느냐? 3대 이상, 즉 손자 때까지는 절대 복종해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때가 오면 절대 복종하면서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시대적인 슬픔과 고통과 비참을 극복했다는 조건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것은 `승리적인 주관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승리적인 주관자'란 말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갖추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피어린 투쟁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도 최고의 슬픔, 고통도 최고의 고통, 비참도 최고의 비참의 기준을 뚫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 피를 토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원수를 위해서 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원수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연고로 어느 한 때를 지나게 되면 찾아 세울 수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러한 승리적 주관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각오를 해야 되느냐? 세계사적인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되는데 이것을 여러분들과 분립시켜서는 안 됩니다. 가정적인 슬픔도 슬픔이겠지만 국가적인 슬픔이 있으면 그것을 여러분의 슬픔으로, 세계적인 슬픔이 있으면 그것도 여러분의 슬픔으로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고통, 가정의 고통도 고통이겠지만 국가적인 고통이 있으면 그것을 여러분의 고통으로 알고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도 고통이요, 남에게 줄 수 있는 입장에서도 고통인 것입니다. 인류 전체가 세계적 목적체를 맞이하여, 전체가 소망의 목적체로 그를 바라볼 수 있고, 전체가 믿음의 목적체로 그를 바라볼 수 있고, 전체가 사랑의 목적체로 그를 바라볼 수 있기 전까지는 고통과 슬픔과 비참이 그대로 남아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문제를 놓고 냉정히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더우기나 1964년은 숫자적으로도 좋지 않은 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해동안 여러분들이 고통을 당해도 역사적인 고통을 당하는 것이요, 비참함을 당해도 역사적인 비참함을 당하는 것이요, 슬픔을 당해도 역사적인 슬픔을 당한다는 자세로 모든 것을 완결짓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결의를 해야 할 1964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