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집: 천국의 거점이 어디냐 1971년 08월 2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45 Search Speeches

억울한 하나님을 모시려면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종교인들이 이 땅 위에서 행복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긍정적인 생활 여건을 찾는다는 것을 시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정의 인연을 찾아가면서 부정의 극(極), 자기의 전체를 희생하는 최첨단에 서야 됩니다. 자기의 생명이 좌우로 엇갈리는 자리에 서서 그것을 결판지을 수 있는 순간을 거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결의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종교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렇게 심각한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그 심각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아들이 되고, 억울한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그 억울한 하나님을 모시고 위로할 수 있는 효자가 되어 보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은 어떤 다짐을 해야 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 있어서 무엇을 그 중심의 골자(骨子)로 남겼느냐 하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예수님의 비운의 자세를 우리는 더듬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 누구도 헤아리지 못하는 운명길을 가슴 깊이 추구하는 마음이 격하면 격할수록, 하나님의 내정의 인연이 가중되면 될수록, 하늘땅을 붙안고 누구보다도 통곡할 수 있는 경각의 자리를 체휼한 사람이 아니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세계적인 주권을 가지고 세계를 움직이는 어떤 국가가 있다 할진대, 그 국가가 그냥 그대로 '내일의 소망을 품고 우리나라만 살아가겠다'고 하면 그 국가는 하나님과 상치(相馳)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어느 민족이 그러하다면 그 민족도 역시 하나님과 상치된 자리에 서게 되고, 혹은 종족, 가정, 개인이 그러하다면 그 종족, 가정, 개인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계가 악한 세계인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을 품고 미련을 남긴 자리는 하나님이 거점을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 일임을 여러분도 능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점으로 삼기는 나라보다는 민족이 쉬울 것이요, 민족보다는 종족이 쉬울 것이요, 종족보다는 가정이 쉬울 것이요, 가정보다는 개인이 쉬울 것입니다. 개인 가운데서도 고집 있는 사람보다 연약한 사람이 쉬울 것입니다. 또 남자와 여자를 볼 때, 주관이 강한 남자보다 주관이 약한 여자가 더 쉬울 것입니다. 여자 가운데서도 인간 생활에 있어서 시달림을 받아 가지고 상처를 입은 그러한 나이 많은 여자보다도 아무것도 모르며 순정을 꽃피우고, 선을 꽃피울 수 있는 나이 어린 여자가 쉽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거점을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거점을 찾은 시간부터 그 자리에 있어서 뜻을 성취해 낼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볼 때, 가냘픈 소녀에게 책임을 지워 가지고 같이 가는 하나님의 입장이라면 그것은 비참한 걸음일 것입니다. 그 소녀를 통하여 그 소녀의 할머니 어머니를 움직이고, 그 할머니 어머니를 통하여 여자들을 움직이고, 그 여자들을 통하여 남자들을 움직이고, 그 남자들을 통하여 가정을 움직이고, 그 가정을 통하여 나라를 움직이고, 그 나라를 통하여 세계를 움직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외로운 비운의 역사를 거쳐 천국을 향하는 하나님의 걸음이 얼마나 불쌍하고 딱하냐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든지 현재 살고 있는 환경에서 내일의 소망의 내용을 제시할 때, 그 환경에서 그냥 그대로 살라고 가르쳐 주는 종교는 없습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사회제도를 부정하고, 자기 삶의 터전을 부정하고, 자기의 생활을 부정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악이 세계적인 판도를 점거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참이라는 것은 악과 상관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여건도 구할 수 없는 입장이 참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 참된 기준의 사람은 오늘날 악이 점거해 있는 사회의 여건에 보조를 맞추는 자리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종교는 오늘날 인간이 살고 있는 악의 환경에서 긍정적인 여건을 일체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정 중에도 절대적인 부정을 합니다. 절대 부정하는 자리에서 숭고하고 절대적인 참의 뿌리를 내리고 싶고, 하나의 환경을 갖고 싶은 것이 절대적인 참의 자리에 선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하는 역설적인 논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사회 실정을 두고 볼 때, 어떤 장관이면 장관은 그 장관 자리를 잃게 될까봐 거기에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제2의 길, 제3의 길을 택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기의 재산과 생명을 걸고 있는 사실을 볼 때, 이런 판국에는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