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집: 아버님이 같이 계시고 싶은 곳 1959년 11월 2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99 Search Speeches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처지와 결심

어린 아기 예수를 그들이 그 같이 대해 주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기쁘셨으나 자라는 예수를 대하는 요셉 가정을 바라볼 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기 예수 앞에 경배하며 예물을 드리던 동방박사와 같은 정성으로 마리아와 요셉 가정도 예수를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이 이루어질 그 한날을 고대하시면서 예수가 자라면 자랄수록 그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을 더 그리워하시고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그때에는 하늘도, 땅 위의 사람도 예수를 환영하였지만 자랄 때는 그러한 자리에서 자라지 못했습니다. 4천년 동안 그리워하시다가 비로소 보내신 아들을 어려운 자리에 눕게 하고, 외로운 자리에 눕게 하셔야 했던 하늘의 심정을 우리들은 알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에게는 의붓자식이지요. 그래서 요셉의 아들인 동생들까지도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또 요셉도 마리아도 예수님의 뜻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잉태할 때는 천사의 명령을 받들어 '주여,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였지만, 예수를 낳아 놓고는 품에 품고 젖을 먹일 때와 자랄 때 대하는 것이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수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 위에 온 예수는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것을 해원해 드려야 할 책임을 느꼈고 자기 하나를 처참한 자리에 놓아 두고 그리워하시는 하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민망함을 느꼈다는 거예요.

4천년 동안 택해서 이끌어 온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또 주님을 그리워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워해야 할 예수를 그리워할 줄 모르는 민족이 된 것이 무엇보다도 하늘의 무한한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예수를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 백성이 반대하고 나설 때에 하나님의 억울함은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예수님은 수심과 곡절에 싸여 자랐습니다. 왜? 남들과는 생활 감정이 다르고 세계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옮겨 놓는 발걸음, 세계를 보는 척도가 달랐어요. 요셉 가정에서 사는 그는 어느 한날 큰 웃음 웃으며 기뻐해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는 세계나 부모, 그리고 가정이란 것이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요셉 가정이 이상적인 가정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는 것은 하늘 가정임을 아신 예수, 그러한 가정을 이루어야 할 사명과 책임을 지고 왔던 예수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 사명을 감당하고 가겠다는 철석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모가 배반해도, 민족이 배반해도, 세워 놓은 유대교가 배반해도 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워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리움의 심정을 갖고 가야 할 입장이었기에 예수는 환경이 변하고 가는 길이 막혀도 죽음을 무릅쓰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 순간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30여 년을 살다가 원치 않는 생애의 종말을 짓는 그 시간에도 아버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보고 싶은 그 아버지, 사랑하는 마음이 앞섰기에 죽음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이라 세워 놓으시고 그리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 자신을 세워 놓으신 목적이 하늘 가정을 찾기 위함이요, 하늘 민족과 하늘 국가와 하늘 세계를 이루기 위함임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지고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버리지 마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원수지만 자신을 세워 놓고 하늘이 소망하시는 것은 이 세계요 이 인류임을 아셨고, 그리워하고 다시 그리워해야 할 이 땅인 것을 아셨기에, 자기가 죽은 후 다시 하늘이 그리워해야 할 이 세계인 것을 아셨고, 예수는 하늘을 붙안고 '아버지시여, 저들의 죄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