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집: 정성의 예물 1967년 01월 2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43 Search Speeches

정성의 목적과 가치

하늘이 내린 정성의 예물을 여러분이 갖고 있다 할진대, 예수가 이 땅위에 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성을 들이셨겠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 위에 기반을 닦기까지 피흘리는 역사를 엮어 오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선조들이 몰리고 쫓기는 눈물의 고비를 넘고, 내일의 소망을 품고 일편단심으로 최후까지 남아지는 아들딸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면서 이 민족을 대신하여 투쟁한 역사적인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산발적인 행사가 아닙니다. 역사의 진로에는 사실을 촉구시킬 수 있는 내용이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대를 품고 넘을 수 있는 무대에서 하늘이 요구하는 대로 정의를 호소했고, 이런 싸움을 해 나온 것입니다.

싸움의 마지막 고비를 넘어야 할 때가 왔는데, 여러분이 이전에 아무리 평지에서 잘 달렸으면 무얼 하고 험산 준령을 잘 넘었으면 무엇합니까? 최후의 분수령의 한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설령 거기서 죽을지언정 여러분은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즉 이미 때는 결실을 해야 하는 가을인데도 여름인 줄 알고 푸르러 있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아궁이 속에 들어가는 불쏘시개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성의 예물을 정성껏 받아야 하며, 하나님이 부르고 재촉하고, 권고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오늘 아침 태릉 성지에 갔었는 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 성지를 누가 얼마나 지키느냐? 세계 40개국의 120개소에 설정해 놓은 성지에는 불이 꺼져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한 계절을 통해서 돌고 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이 하나의 방송국이 되어 세계에 전파를 보내야 합니다. 한국에서 전파를 보내면 세계의 성지에서 그 전파를 수신하여 하늘 앞에 감사와 송영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지는 이런 하나님의 지상 초소인데도 불구하고 그 초소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선지자나 식구들은 하늘 앞에 서러움의 무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성지에 대한 마음이 지극히 깊은데 자녀들이 나타나지 않으니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서러우시겠습니까? 성지에 대한 하나님의 서러운 마음은 여러분이 사죄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우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여 하나님이 그로 인해 서러움을 느끼게 될 때는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충신 열녀는 다시 될 수가 없습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상하 전후 좌우에서 들인 정성을 유린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그 정성을 받아서 사방에 나누어 주고, 꽃을 피워 많은 후손들이 쌍수를 들어 크게 추대할 수 있게 정성의 예물을 잘 보관하고 있느냐? 이것이 없다면 하늘의 진노가 태풍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하늘 군대의 분풀이가 땅에 진동하는 날에는 여러분은 갈 곳이 없게 됩니다. 즉,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또한 산꼭대기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갖춘 것이 없고 실적이 없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이루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보다는 나라를 위해서, 나라보다는 세계를 위해서 눈물흘려야 합니다. 대한민국, 한민족, 배달민족이라고 하는 이 민족이 없어지더라도 세계는 남아져야 합니다.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세계 인류로 남아져야 합니다. 국가를 위해 정성을 못 들이더라도 세계를 위해 정성들이고, 세계를 위해 정성을 못 들여도 하나님을 위해 정성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일 귀한 선물을 주시기 위해 최고의 기준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12 :30)"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선조들이 들인 정성은 소망의 정성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망의 한 날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몸부림친 정성이었지, 소망을 차지하여 하늘을 모시기 위한 정성은 못 들여 왔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입장에서, 탕감노정에서의 뒤넘이치는 정성은 되었을지언정 소망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정성은 못들였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는 그런 정성을 인간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원수를 전부다 굴복시키고, 탕감세계의 한에서 벗어난 아버지께 충과 효의 모든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통한 기독교 2천년의 섭리역사상에서의 모든 정성은 하나님의 가슴속에 못자국만 남겼던 슬픈 정성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