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집: 기필코 가야 하겠습니다 1972년 11월 12일, 한국 중앙수련원 Page #214 Search Speeches

탄식과 절망의 자리-서도 희망을 갖고 담대했던 예수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이 땅에 와 가지고 삼십 여생을 불행하게 살다 간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요셉 가정에서 마리아의 복중을 빌려 태어났습니다. 의붓아버지인 요셉의 품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자기 동생들까지 예수를 비난했습니다. 의붓아버지의 인연을 따라 태어난 예수는 세상으로 보면 불쌍한 어린아기로 자랐습니다. 요셉은 물론 예수를 사랑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자기 피를 통해서 태어난 아들딸들보다도 더 사랑했느냐, 덜 사랑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라구요.

요셉이 꿈 가운데 마리아를 데려오라는 말을 듣고 마리아를 데려왔는데, 그 마리아가 잉태를 했다 이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꿈 가운데 데려오라는 말을 듣고 데려온 마리아를 열 달이 되도록 그냥 두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 있어서 별의별 사연이 없었겠느냐 이겁니다. 남자의 욕심으로 볼 때, 그 배후를 추궁하고 싶지 않은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추궁 하는 날에는 마리아는 불행하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한 번 묻고 두 번 묻게 되면 마리아의 가정은 화가 벌어진다 이겁니다.

만일에 화가 벌어지고 말다툼이 벌어지는 그 틈바구니에서 그 주모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라는 인물을 중심삼고 안팎으로 엇갈린 가정환경이 벌어졌다면 예수는 얼마나 고독했을 것이냐? 통일교회는 이렇게 예수님이 불쌍한 아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기 때부터 불쌍하게 자랐습니다. 그런 사실을 동네방네 친척들이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면 소재지의 구석구석까지 다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진짜 사랑하는 아들을 거기 두고 길렀겠어요? 할 수 없이 애급으로 피난을 보낸 것도 하나님의 도피적인 작전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볼 때, 예수님은 비참하게 태어나서 비참하게 자랐습니다. 명절이 되어도 요셉은 자기 아들딸에게는 좋고 맛있는 것만 먹였을 것입니다. 그랬을 거라구요. 오늘날 하늘이 사랑하는 목자가 있다면, 여러분은 그 목자를 대해 가지고 '아, 우리 아들딸보다도 더 사랑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해요? 먹을 것이 있으면 자기 아들딸의 입에 넣어 주게 마련이지.

이런 등등의 문제를 볼 때, 예수님은 불쌍하게 태어나 불쌍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몰려 가지고 비참한 운명과 불쌍한 자리에서 탄식과 더불어 사라져 가신 분입니다. 그랬던 예수가 아니예요? 보라구요.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을 보면, 예수님은 일생 동안 무엇 때문에 살았느냐 할 때, 자기 뜻대로 살다 간 사람이 아니라구요. 누구 뜻대로 살았어요?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으니 그는 자유롭게 행동한 사람이예요, 부자유스럽게 행동한 사람이예요? 부자유스럽게 행동을 한 사람이라구요.

원수가 나타나면 그 원수를 대해 가지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 아버지의 뜻을 위했기 때문입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자기 소신의 뜻은 있을망정, 그 뜻대로 행동할 수 없다. 그것이 효의 길이요, 충의 길이 아니예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에서의 효자도 어떤 사람이냐? 자기 개인의 몸과 자유의사는 갖고 있지만 일체의 생활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부모를 위해서 일생을 희생하면서 부모의 뜻대로 가려고 하는 사람을 효자라고 합니까, 불효자라고 합니까? 효자라고 하는 거라구요. 하나의 군왕을 중심 삼고 볼 때, 군왕의 뜻대로, 자기의 뜻을 완전히 무시해 놓고, 주권자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충신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도 자기 뜻대로 나지 않았고, 살면서도 자기 뜻대로 살지 않았고, 최후에 죽을 때까지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고 간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남의 뜻대로 태어났고, 사는 것도 남의…. 그 남은 남이 아니라 아버지라구요.

그런데 절망으로 갔느냐 절망으로 안 갔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구요. 절망적으로 갔느냐? '나는 비록 몰려서 죽고 비참하게 죽더라도 내 소원만은 절망이 아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비록 탄식의 자리요, 낙망의 자리요 절망의 자리지만, 내 희망만은 승리를 표방하는 데 있어서 당당했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그랬기 때문에 예수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은 절망에 부딪치는 것이요 낙망에 부딪치는 것이지만, 아버지의 뜻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요 승리이기 때문에, 그 승리를 표방하는 자리에서 자기의 생명을 넘나드는 순간이나마 불충 불효의 위치를 넘을 수 있다는 데 희망을 가지고 담대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역사시대에 보여 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어느때에 보여 주시면 좋겠느냐? 하나님이 정서적인 심정을 가진 분이라면 어느때에 '내 아들아! 네가 죽은 것은 잘 죽었다' 할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