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집: 통일교회의 길 1963년 10월 18일, 한국 광주교회 Page #62 Search Speeches

십자가의 전통-서부터 출발한 통일교회 식구의 인-

여러분들이 논하는 심정의 문제가 어디에 비교 되느냐? 예수의 몸을 붙들고, `나는 예수가 눈물을 흘리기 전에 내 눈에서 먼저 눈물이 흘러 예수의 손을 적실 수 있는 심정의 동반자가 되겠다. 죽은 후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고, 죽기 전에 그런 안타까운 심정을 알아 가지고 내가 십자가에 돌아가는 이런 고통 자리에 동참하여 죽음 후에 슬퍼하던 선조에 선행하는 슬픔의 자리에서 그 심정을 놓고 회개하고 나가겠다'는 그런 마음 바탕을 소유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원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하는 기도는 예수의 기도가 아닙니다.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기도가 아니예요. 그걸 생각하면 통곡이 벌어져요. 통곡이 벌어진다구요. `울고 울어도 한이 없어서 원통합니다. 아버님, 우리 선조들이, 4천 년 수고하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찌하여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던고! 4천 년 동안 닦아 놓았던 유대교가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던고!' 하고 천년 만년 울어도 그칠 수 없는 원통한 한을 여러분들은 모를 것입니다. 나는 이 길을 책임지고 이 길을 닦아 나올 때, `저들은 예수를 위해 철야기도하는 그 친구의 자리에 못 섰고, 제자의 자리에 못 섰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역사적인 길을 선행하여 투쟁해 나오며 길을 닦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통일교회가 태어난 탄생의 기반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의 각오, 민족의 죄상을 염려하던 그 벅찬 심정의 고통, 미래에 이스라엘 민족이 환란 도상과 처참한 제물의 과정 하에서 탄식하면서 유리고객하여 예수를 죽인 죄로 처참한 학살의 무대를 향하여 무덤을 메워야 할 그 처참한 사정,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 예수 자신의 고통도 컸지만 역사적인 책임적인 고통이 더 했고 그 고통적인 사명이 남아 있는 연고로, 그 책임자는 예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를 부활시킨 것입니다. 다 마찬가지라구요.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피흘리는 역사적인 깊은 자리에 들어와 어디에서 만난 식구냐? 통일교회의 여러분들은 어디에서 만난 식구냐? 통일교회의 스승은 어디에서 만난 스승이냐?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나니, 여러분들을 편한 자리에서 만난 식구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최고의 십자가의 혈전장에서, 못이 박히는 자리에서 '아무개야, 내 손길 네 손길 붙잡고 죽고 싶구나' 하는 그 자리에 있어서의 못 박히기를 각오하고, 못박히는 그 도상에서 하늘의 특권적인 혜택을 얻어 해방을 받은 그 자리에서 만난 우리 식구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의 `우리들' 이라는 것은, `식구'라는 그 명사는 어디서부터 출발했느냐? 십자가의 전통에서부터, 피가 흐르고 피눈물이 엮어지는 그러한 자리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 주고도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 없고, 무엇 주고도 바꿀래야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인연인 것입니다. 부모가 반대하면 부모의 인연을 끊고라도 이 길을 가야 되고, 민족이 반대하면 민족의 인연을 끊고라도 가야 되고, 천지가 반대하면 천지의 인연을 끊고라도 가야 됩니다. 죽어도 이 길 을 붙들고 죽어야 되고, 살아도 이것을 붙들고 살아야 하고, 이 한이 세계적인 한으로 맺혀 있으니 세계적인 한을 풀 때 이것을 붙들고 눈물을 짓고 가야 할 그런 걸음이 통일교회의 걸음이요, 통일교회의 스승이 가는 걸음인 것을 여러분들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오늘날 이 길을 나오는 데에 있어서 스승은 친구가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도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통곡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있었지만 이 땅 위에 그런 입장에서의 누굴 붙들고 통곡해 본 친구와 동지는 없어요. 내가 목을 내어서 울고 싶은 때에 어느 누가 그런 사정을 한마디만 말하면 당장에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렇게 슬픔에 잠기어 태산 같은 고통을 품고 가는 스승임을 여러분들 잊지 말라구요.

여러분들을 남한 각지에 보내 놓았는데, 굶주리는 자리에 가라고 하는 스승이 어디 있으며, 자기 아들딸을 고난에 몰아넣을 그런 부모가 어디에 있겠느냐? 민족을 살려야 할 책임이 있으니, 인류을 살려야 할 책임이 있으니…. 지구장이 몰려올 적마다 `야, 이 자식들아! 너 지방에 돌아가면 식구들을 그저 고생을 시키고 죽을 자리로 내몰아라' 하는 거에요. 스승이라는 사람이 번번히 그래. 영원히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어야 되겠습니다. 영원히 그 누가 부정하여도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인연을 맺어야 되겠습니다. 십자가로 갈라졌으니 십자가로 만나야 되겠습니다. 십자가로서 눈물을 지으면서, 가슴으로 눈물지으며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고생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먼 것이 아니예요. 3년 고비, 7년 과정을 넘어가야 돼요. 예수가 40당대에 세계적인 무대를 중심삼아 가지고 40 고개를 넘기려고 했는데 33세에 죽어 성사를 못 하고 갔으니, 7년 공생애를 남기고 갔기 때문에…. 끝날에 있어서의 사회적인 환경에서 유대교와 같은 입장에 선 것이 전세계 기독교요, 제2 이스라엘과 같은 입장, 그때의 선민과 같은 입장에 선 것이 이 민주주의라는 겁니다. 민주주의와 유대교 주의를 축소시킨 그 대표적인 국가가 한국이예요. 여기는 좌우가, 세계적인 정세가 부딪힌 곳이요, 온 세계의 문화가 결실하는 곳이요, 온 세계의 문명 기구가 전시된 전시장이예요. 그리고 종교도 불교로부터 유교, 기독교까지 전부 다 꽃피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