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집: 주관성 복귀 1971년 10월 0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9 Search Speeches

한 사람이 승리하면 하나님의 -사적 수고가 "러나게 돼

사람은 일대(一代)에 있어서 전체를 다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20대의 청소년들에게 `너,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세계를 내 것 만들겠다'할 것입니다. 열 살만 넘으면 벌써 세계를 내 것 만들겠다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된다는 거예요. 국민학교 다니는 학생들에게도 `너, 이다음에 커서 무엇이 될래?' 하고 물으면 `대통령 되지요' 이런다는 거예요. `무슨 대통령?' 하면 `세계 대통령' 이러는 것입니다. 다 그렇게 말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생각할 줄 아는 때에서부터 일생을 마치고 죽을 때까지 바라는 소원입니다. 그것은 개개인이 전부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그 사람들이 전부 그러한 소원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30억 인류가 살고 있지만 30억이 전부 다 그러한 소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소원이 무엇이냐 할 때, 세계를 내 것 만들겠다고 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소원하는 것을 한 번도, 단 한 번도 성취하지 못하고 간다면 그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만일 절대적인 하나님이 계시다면….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러한 인간의 소원 그 욕망은 언제까지든지 남아질 것이어늘, 그 욕망이 한 번도 성사되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절대자가 있다면 인간이 그렇게 바라는 욕망이 이루어질 때가 한번 올 것입니다. 그때가 어떤 때냐? 이 지상의 천국과 천상의 천국이 갈라져 가지고 나타나는 때가 아니라, 자체내에서 화(和)한 천국으로 나타나게 될 때입니다. 그렇게 화한 천국권내에 사는 개인은 개인이로되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리 낮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만 서 있으면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돌아가는 하나의 원형과 마찬가지입니다. 낮다고 낮은 것이 아니예요. 낮은 것은 높은 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낮으면 낮을수록 그 상대되는 것은 높은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나' 자체를 위하지 않고 상대를 위했다고 할 때 비로소 공동적인 관계성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관계성을 갖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협조적이고 통일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결속되는 데서만이 그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면 홀로 있지만 홀로의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 가치를 가한 가치의 자리에 섰기 때문에 전체로 보게 되면 이중적 가치를 겸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느끼는 행복은 자기 개인만의 행복이 아니라 이중적 세계를 대표한 행복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가치를 찾은 기준이 아직까지 인간 세상에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역사시대로부터 섭리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중간 입장에 누가 있어야 되느냐? 우리 통일원리에서 가르쳐 주고 있듯이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이 있어야 됩니다. 본성의 인간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종교가 주장하는 재림사상은 무엇이냐? 그게 다 뭐냐? 본성의 인간을 추구하고자 하는 소원을 이루는 데 불가피한 것입니다. 인간이 본성의 인간을 추구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 타락입니다.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은 본래 본성의 인간으로 출발했을 것인데, 타락이 있었기 때문에, 본성의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추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복귀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다시 회복해야 된다는거예요.

그러한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역사시대에 처해 있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인간은 신음의 도를 가해 가면서…. 옛날에는 개인적인 신음의 도에서 개인적으로 신음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제는 그 범위가 넓어져 가지고 가정이, 종족이, 민족이, 국가가, 세계가 신음하는 최고의 정상까지 도달 했습니다. 여기에서 신음의 도를 탈피하여 본래의 무한한 개인의 가치를, 이 세계의 그 어떤 가치보다도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그 자리를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거기에서 주장하는 통일관은 세계 전체의 끝에 가 가지고 주장하는 통일관의 가치와 대등한 것입니다. 도리어 이것이 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보면 더 넓다는 거예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높은 곳 끝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한 자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넓어지는 것입니다. 낮다고 해서 낮은 것이 아닙니다. 전체를 받아들일 수 있고, 전체를 소화시킬 수 있는 중심적인 자리라면 그 자리는 복된 자리인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을 비교해 보게 될 때, 부모는 복된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고생스럽지만, 자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생스럽지만, 낮은 자리에서 희생을 하지만, 그 아들딸 가운데 한 사람만 높아지면 그 부모는 언제든 그 높아진 전체의 가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들 가운데 하나만 훌륭해지면, 훌륭한 아들이 하나만 있으면, 아들이 열 명 혹은 스무 명, 서른 명, 몇백 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몇백의 자녀들을 위해 수고한 부모는 그 가운데 하나만 훌륭해지면 그 훌륭한 아들과 상대적 기준을 가지고 낮은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등적인 가치 이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류를 대신하여 수고하시는 거예요.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러 나왔지만, 그 섭리역사노정에서 한 사람만 잘나면, 한 사람만 승리하는 날에는 그 한 사람의 승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고로 수고하였던 모든 수고의 가치는 전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수고를 했으면 했을수록 그 가치가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수고를 했으면 했을수록 그 가치가 더 빛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 아들을 찾아 나온 것입니다. 그 아들은 어떤 국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이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가 그 아들을 위해 있고 세계가 그 아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아들이 먼저 국가와 세계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예요. 가치로 볼 때에 그 아들 이상으로 가치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은 중심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서 `주관성 복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주관성 복귀! 그러면 그 한 사람이 왜 오느냐? 무엇 때문에 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오느냐? 물론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인간을 지었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러한 한 사람을 기필코 이 땅위에 탄생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탄생시켜서 무엇을 할 것이냐? 그 한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다리로 해서, 그 사람을 기점으로 해서 사방으로 관계맺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사방으로 뻗쳐지는 거예요.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뻗쳐졌다가는 사고라는 겁니다. 끝까지, 끝까지, 끝 중에서 최고의 끝은 여기라구요, 끝까지 참는자는 구원얻는 것입니다. (판서하신 것을 가리키며 설명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