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집: 통일사상의 실천자 1971년 11월 06일, 한국 광주교회 Page #93 Search Speeches

같은 행위라도 동기- 의해 그 가치가 달라진다

그러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여기 온 사람을 다 악한 사람이라고 하면 기분 나쁠 거예요. 눈을 요렇게 뜨고 보는 사람을 보게 되면 선한 것 같지만 진짜 선한 사람이 있을 성싶지 않다고 아까 말했지요? 그럼 전라남북도 도지사 두 양반이 합의해 가지고 전라남북도를 대표할 수 있는 인격자를 뽑았다고 할 때, 그가 대한민국에서 일등할수 있어요? 각도의 대표들과 겨루면 요것 될 수 있지요, 요것? 요게 무언지 알지요? 꼴래미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꼴래미 될 수있다구요.

그러면 대한민국에서 일등 되는 사람이 세계에 나가 일등할 수 있어요? 있어요, 없어요? 뭐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예요. 일등할 가능성은 있지만 지내 봐야 안다는 거예요. 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일등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계 사람이 이만큼 두껍다면 대한민국에서 뽑힌 사람이 그 사람보다 한 꺼풀만 더 두꺼우면 일등이예요, 일등 아니예요?「일등입니 다」 한 꺼풀이 아니라 종이 한 장만큼만 더 두꺼워도 일등이예요, 일등 아니예요? 한 장의 백 분의 일만 두꺼워도 일등이예요, 일등 아니예요?「일등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일등하고 이등하고의 차이가 얼마나 되느냐? 거의 없습니다. 요즘에는 그렇잖아요? 야구 경기할 때 아웃(out)하고 세이프(safe)를 잘가리지 못할 때는 그 장면을 빠른 속도로 촬영해 두었다가 일초의 몇백 분지 일의 기준내에 잡힐 수 있게 해 가지고 그것을 가립니다. 그런 식으로 일등 이등을 가려 가지고 이등이 되면 기분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세계적인 무대에 나가 그렇게 해서 일등을 차지하지 못했다면 기가 막히겠지요?

거 일등 못 한 원인이 뭐냐? 연습을 하다가 동무가 와서 '야 아무개야, 오늘 좋은 일 있으니 나하고 가자'고 하면,'친구들 끼리 사연 들어주지 못할 게 뭐 있나' 하며 바랐던 듯이 '어 그래. 어서 가세' 해 가지고 하루 동안 연습 못 함으로 말미암아 이등이 될 수 있다구요. 안 그래요? 하루동안 연습 못 한 것이 천년 한을 맺히게 하는 결과가 되더라는 거예요. 하루 뿐만이 아니라 한 시간, 한 순간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천년사가 망쳐질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감옥에 들어가 보면 말이예요. 선생님은 경험자입니다. 감옥을 들락날락하고 지금까지 이런 놀음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감옥에 척 들어가 보면 말이예요. 형무소 들어오겠다고 생각하고 들어온 사람은 한명도 없다구요. 있을 것 같아요? 감옥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그 놀음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또 감옥이 얼마나 지독하다는 것을 안다면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지요?「예」 감옥에 들어오겠다고 해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구요.

감옥에 들어오게 된 동기를 헤쳐 보면, 계획적으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배워 가지고 나온, 그런 동기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어느 시장 거리 지나다가 친구를 만나 가지고, 친구가 '얘, 아무개야, 이렇게 한번 하면 수가 난다. 내 말만 들으면 그저 일생 동안 다리 뻗고 편하게 살 수 있다'고 하니까 '그래? 한번 가 보자'고 했던 욕심 많은 패들이 들어온 거예요. 한마디 말을 건넬 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쪽으로 따라가기 시작한 것이 동기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는 집안 다 망쳐 버리고, 자기 일신 다 망쳐 버리고, 자기 여편네 아들딸 할 것 없이 다 망치게 해 놓고는, 감옥에 들어와 앉아 가지고 '아이구' 하며 후회하는 사람 참 많이 봤습니다. 혼자 한숨 쉬고 있다구요.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히거든. '그 순간만 안 움직였으면 죄를 짓지 않았을 텐데. 아이고 요 순간이 문제로구만…' 이러면서 신음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흥망성쇠의 동기는 몇 천년 중심삼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똑딱' 하는 순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거예요. 알겠어요?「예」

똑딱하는 순간에 결정되긴 되는데, 같은 사건, 같은 현장에서 자기보다 남을 위하다 그렇게 된 사람이 있다면 오로지 자기 욕심을 채우려다 그렇게 된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고아원 원장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고아원 원장은 수백 명의 원아들을 거느리고 먹이고 입히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는 사람인데, 겨울은 다가오고 입힐 옷가지는 없는 딱한 사정에 처해 있을 때, 좋은 수가 난다고 하니까 따라가 동조를 해 가지고 사건에 걸려 들어갔 다면, 이렇게 될 때는 내용이 다르므로 결과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공판정에 나가 재판을 받는다 할 때,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 걸어온 길이 어느누구에게도 비판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소질이 있기 때문에 동정의 여지가 없지만, 고아원 원장의 경우는 그 걸어온 길이 자기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수백 명 원아들의 생명을 책임진 입장에서, 다가오는 동절에 입힐 것을 마련 하기 위하여 허덕이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친구라고 믿고 나섰다가 이런 결과를 당했으니 재판장의 판정은 어떻게 될 것인가? 두 사람이 똑같이 그런 자리에 갔더라도 한 사람은 용서할 수 없으니 처단의 형을 선고할 것이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는 '이 사람은 선의의 피해를 입은 자며, 우리 국민 중에는 이 사람과 같은 사람이 많아야 될 것이다'고 강조하고 나서 무죄를 선고할 것입니다. 재판장이 이런 선고를 했다고 해서 거기에 모인 청중이 5백 명, 5만 명, 5십만 명, 5천만 명이라고 해도 '때려죽여라, 이놈의 재판장. 쳐버려라' 그러겠어요? 오히려 청중은 불쌍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의 진술을 들을 때, 동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중이 그 사람을 구해 주기를 바랐던 찰나에 그런 선고를 했다면 모두 좋아할 거라구요. 그렇지요? 이러한 결과가 벌어진다는거예요.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왜 대중이 그 사람을 옹호하려고 하고, 왜 대중이 그의 앞길이 펴지기를 바라고, 왜 대중이 그 사람의 변호인의 입장에 서고자 하느냐?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뇨? 그것을 부정히하는 날에는 역사의 가는 길은 꺾어지고 마는 것이요, 인간들이 소원하는 선의 작용은 종말이 나 버려 가지고 함정에 떨어져 사망의 세계로 추락되고 만다는 것을 은연 중에 우리 양심은 알기 때문에, 그러한 편에 서려고 하는 것이요,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본성의 작용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겠지요?「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