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집: 주관성 복귀 1971년 10월 0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55 Search Speeches

주관성복귀의 방법

자, 그러면, 주관성 복귀, 주관성을 어떻게 복귀해야 되느냐? 악한 사탄세계에서는 주관성을 강제로 복귀하려고 합니다. `너는 내가 지배해야 되겠다'라고 하면서 채찍을 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관하려고 한다구요.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주관해야 하느냐? 본성적 주관성의 복귀는 무엇을 토대로 해야 하느냐? 오늘날 사탄세계와 마찬가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출세하기 위하여 제삼자를 희생시키고 모해하고 하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주관권은 한때밖에 못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주권자가 있다면 그 주권자는 얼마 못 가서 끝나는 것입니다.

하늘은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주관성을 제시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희생과 사랑입니다. 희생과 사랑의 테마를 앞세우고, 갖은 수욕과 갖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 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주관성을 취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자동적인 주관성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도 그렇다구요. 선생님이 명령을 하게 되면 그 명령이 여러분의 마음에 딱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 하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요. 하라는 대로 안 하면 편안하지 않을 거라구요. 편안해요, 편안하지 않아요? 난 모르겠어요, 여러분은 어떤지. 나 자신은 편안하지 않다구요. 만일 편안하다면 그는 통일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편안하지 않은 사람이 통일교회 교인이라는 거예요. 편안한 사람은 통일교회 교인이 아니라구요.

선생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움직이지 않으니 선생님이 선두에서 달리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달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시키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먼저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여러분을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달라요. 지금까지 내가 통일교회에서 말한 것은 내가 다 실천한 거라구요. 복귀원리는 전부 다 실천해 나온 것입니다.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그 종족의 선두에 서는 것입니다. 민족의 선두에 서는 것입니다. 세계의 선두에 서야 됩니다. 어떻게 서느냐? 그 방법을 여러분은 모른다구요.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에 선두에 서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가야 되느냐? 그러한 중심적인 사명을 진짜, 진짜 책임지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스토브는 열을 발생하는 것입니다. 스토브를 피워 놓은 방에 들어가면 그 열을 감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통일교회도 그런 감각권내 스토브의 온기가 영향 미칠 수 있는 권내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할 때 여러분이 안 하려고 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살아 온 사람이 있다면 그는 통일교인이 아닙니다. 그것을 오래 못 하게 되면 병이 나는 거라구요. 통일교회 오래 믿던 사람들이 끝까지 가야 할 텐데 가지 못하게 되면 병에 걸리는 거라구요. 나는 그렇게 봅니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한 곳으로 치우치니까, 이것이 자꾸 이렇게 기울어지니까…. 좋은 자리에서 잘 먹고, 좋은 침대에서 자는 사람보다도 도리어 지방에 나가서 꽁보리밥을 먹고, 몰리고 쫓기면서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도리어 희망이 벅차오르는 것입니다. 먹지 못하고 밤을 새우는 자리에서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바라볼 때, 거기에 새로운 세계가 찾아드는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것이요, 불어오는 바람결에 느껴지는 그 환경을 생애에 처음 맞는 은사의 분위기로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행복하겠습니까? 마음의 고통을 품고 세상적으로 볼 때 좋다고 하는 자리에 선 것이겠습니까, 세상적으로 볼 때 나쁘다고 하는 자리이지만 마음의 희망을 품고 일선에 나가 몰리는 자리에 선 것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좋다는 자리가 아니라 몰리는 자리가 도리어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그 길을 찾아 가는 것이 우리 통일교회의 길이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꺼떡하면 청평에 갑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어요. 내가 옛날에 이 길을 닦아 나오면서 고생하던 그 자리가 그립고, 산야가 그립고, 들려오던 바람 소리, 새 소리가 그리워서 가는 겁니다. 그 흘러 내리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서 하늘의 감동의 세계에 접촉하던 그 기분이 그리워서 가는 겁니다.

여러분, 봄이 그립지요? 여름을 맞고 가을을 맞이하면 봄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 그리움은 죽을 때까지 누가 빼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자리에서, 배고픈 자리에서 참고 명상을 하면서 하늘과 더불어 인연맺던 그 시간이 그리워진다는 거예요. 혹은 불어오는 바람결을 느끼게 될 때, 그것이 과거의 인식을 현실의 생활권내에 재촉시켜 주기 때문에, 과거에 그것이 자극적인 동기가 되었다면 현실에서는 생활적인 동기로 현현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는 거라구요.

내가 청평에 가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 없이 다닌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뭐 일 없이 다녀요? 천만에요. 가 가지고 나 나름대로 가야 할 길을 닦아 나가는 거예요. 심각하다는 거라구요. 그런 무엇이 있다구요. 전쟁을 하고 나면 칼을 가는 것과 같은 그런 생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추구하는 것은 나의 행복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잘살고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절대 일생 동안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잘해서 내 아들딸을 잘 입힐까 하는 생각을 안 한다는 거예요. 이 나라와 세계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생각하는 거예요. 엊그제만 하더라도 큰 판국을 벌여 놓아서 몇천만 원이 필요한데 주머니에는 딱 2천 원밖에 안 남아 있었어요. 몇천만원 써야 할 텐데 대책이 없다구요. 그렇지만 걱정을 안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걱정 안 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이렇고 이렇고 이렇기 때문에 걱정 안 해도 된다, 이것은 반드시 해결된다…. 그러면 한구석에는 복닥불이 벌어지는 거라구요. 선생님이 그러한 자리에 있으면 돈 가진 사람은 못 배긴다는 거예요.

그런 놀음을 하면서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발전해 나왔습니다. 모험의 연속이요, 싸움의 계속이었습니다. 투쟁 중에서도 모험적인 투쟁을 해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혁명적인 처소에 있으면서 불어오는 풍파를 전부 다 가려 내어 오늘날 이만한 세계적인 기반을 닦아 놓았습니다. 이제 이 10월만 넘어가게 되면 내가 죽더라도 눈을 감고 죽을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간다고 봅니다. 이 1971년만 가게 되면, 우리가 1972년도까지 잡고 있지만 말이예요. 1974년도부터는 세계적으로 났다는 녀석들, 하늘 높은 줄모르고 높다는 녀석들은 전부 들이박을 것입니다. 그럴 때가 온다구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고 내가 바라보는 세계관이 틀림없는 이상, 생활환경에 있어서나 세계정세 가운데서 들어맞기 때문에 그야말로 사나이로 태어난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한마디 말도 그냥 그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중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수단 방법으로 주관하려는 거기에 복귀의 뜻은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해 가지고, 세계를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 일신을 가눌 수 있는 일체의 환경을 포기해 버리고 세계를 가누어 주고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려 드리기 위해 자기 일신을 제물로 삼고자 하는 생활과정에서만이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법도가 제정되는 것이요, 그 사랑을 중심삼고서야 새로운 주관성의 터전이 넓혀져 나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