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집: 종대와 순과 샘 1966년 12월 2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60 Search Speeches

보다 큰 것을 위해 살아야 할 인간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여기에서 하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나무로서 자라온 목적, 즉 생의 목적을 완결지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존재해 온 스스로의 목적을 완성할 수 있는 동시에 존재시킨 창조주의 목적도 달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두고 말한다면, 인류가 바라는 목적이 완결되는 동시에 인류를 창조한 창조주의 목적도 완결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기필코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느냐? 이것부터 분석해야 됩니다. 내가 살아온 과정이 어떠했는가 분석해야 됩니다. 종교니 하나님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들은 꿈도 안 꾸었다 이거예요. 그러니 거꾸로 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뻗어 나가는데 나는 어디로 갔어요? 지평선 이하에 사는 사람, 지하에 사는 사람, 굴에 사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나갈 구멍이 그저 하나밖에 없으니 그 구멍만 나가면 살 줄 압니다. 나가는 구멍 앞에 구덩이가 있어서 어떻게 될 줄은 모릅니다. 그런 입장에서 여러분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세의 타락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인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여러분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하늘의 역사가 그렇게 순을 향하여 흘러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 있으나 그 목적하는 바를 나라와 인류와 세계 등, 큰 데에 두어야 됩니다. 알겠어요? '나'를 위주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나를 위주한 가정이라고 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가정을 위한 나, 종족과 민족을 위한 나, 국가와 세계를 위한 나라는 관점에 서야 인생에 있어 보람 있는 현재의 위치를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위주한 가정이요, 나를 위주한 사회요, 나를 위주한 국가요, 나를 위주한 세계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아의 방향조차 파탄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양심을 가만히 두드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양심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십시오. 길을 가다가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양심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요? 꿈에도 생각지 않은, 혹은 몇천년 전, 우리의 조상들도 생각지 않은 사람을 떡 만났을 때, 그 불쌍한 사람을 만나 그가 배고파하는 걸 볼 때 양심은 '지갑에 있는 돈을 주라'고 합니다. 지갑에는 삼백 원밖에 없어도 그것을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쌍한 사람에게 백원을 줘서 지갑에는 이백 원밖에 없는데 가다 보니까 아이고머니나,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양심은 또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또 백 원을 주고 가다 보니까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또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나머지 돈을 주고 이제는 돈이 한푼도 없이 가고 있는데 또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양심은 '네 옷이라도 벗어서 그에게 입혀 주어라'고 합니다. 양심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좋은 일을 한 번 했다고 해서 뭐라고 해도 양심은 코웃음을 칩니다. '좋은 일을 해서 성공을 하고 좋은 일을 해서 목적을 달성했으니 만세나 부르고 개가나 부르고 기뻐할 일이지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계속 재촉하는 거예요. '하라, 하라, 하라'고 합니다. 좋은 일에는 해서 끝나는 종말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일을 하는데 사랑하는 친구에게만 하라고 그러느냐? 아닙니다. 가정과 환경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라고 마음은 명령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이냐? 주고받으면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늘땅의 공법에 의해 잘 주고 잘 받으면, 그때 준 것은 억만세에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의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가르치고 불교에서는 자비를 가르칩니다. 그게 다 뭡니까? 사람들의 것을 전부 다 빼앗아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을 전부 다 꺼내서 나눠 주라는 것입니다.

종교가 가르치는 것은 희생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 큰 것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도주는 누구일 것인가? 선생님은 옛날부터 이런 것을 분석해 봤습니다. 석가 같은 양반은 왕자로 태어나 가지고 그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산에서 도를 닦았습니다. 그리하여 도를 깨우쳐서 불교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라는 분은 어떠했는가. 몰리고 쫓겨다니고 어디 가든지 배척받고,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몰리다 몰리다 할 수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은 예수는 원수들에게 복수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세계 인류를 위해 기도하고 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성인들과 질이 좀 다르지요. '내가 죽되 세계를 위해 죽어서 세계 인류와 인연을 맺고 세계 역사와 관계를 맺어 영원토록 책임지겠다'는 신념을 갖고 죽어간 것입니다. '내가 뿌린 피는 이 시대 사람들을 위해서 주겠다' 한 것입니다. 수천만대 역사를 초월하고 거리를 초월해서 준 것입니다. 주는 데도 하나님이 공인하는 자리에서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자리에서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 이루었다'고 한 것입니다. 완전히 주고 완전히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완전히 주고 완전히 받았으니 다음에 또 다시 요구할 때는,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혼자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는 자리에서도 세계를 위해 주고 세계의 역사적인 인연을 거머쥐고 하나님의 마음을 틀어 잡아 가지고 하나님이 눈물 지을 수 있는 기준을 세워 놓고 갔기 때문에 그는 죽어서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었고 무덤에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공자나 석가 같은 다른 도주들과 좀 다르지요.

죽음을 넘어서는 그 자리에서, 생사를 결판짓는 그 자리에서, 생명을 놓고 투기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자신의 정조를 잃지 않고 올바른 자리 마음이 요구하는 희망봉에서 세계를 품고 하나님을 붙들고 그 길을 갔기 때문에, 예수는 죽었으되 그의 사상과 뜻이 만민의 것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만민의 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예수의 것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역사시대에 수많은 인간들은 예수를 자기의 최고의 희망으로 삼고 신랑처럼 사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동기가 성립됐던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라는 것이 성립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