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집: 오고 가는 인생길 1972년 11월 1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05 Search Speeches

공적인 삶만이 -사와 "불어 영원히 남아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은 오늘의 기쁨만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기쁨은 어디까지나 영원히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슬픔은 영원히 연결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슬픔은 빨리 청산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기쁨을 남기고 슬픔을 청산지어야 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자기의 일생 가운데 남아지는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제일 기뻤을 때, 제일 슬펐을 때, 제일 어려웠을 때, 이렇게 우리는 세 가지를 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려웠다는 것을 중심삼고 볼 때 그 어려움 가운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 자신을 위해 어려웠던 일, 나라라든가 하는 전체, 전체를 위해 어려웠던 일이 있습니다. 자기 개인을 위해서 한 어려웠던 일은 개인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와 인연을 맺을래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내 개인을 넘어서서 전체를 위해서 어려움을 당했다면 그것은 전체와 더불어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결국은 애국자들은 뭐냐 하면, 자기 개인의 어려움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전체의 어려움을 해결짓기 위해 개인이 그것을 책임지고 나섰던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겪는 어려움은 전체를 대표한 어려움이기 때문에 전체와 더불어 인연맺게 하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애국자 가운데에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고생한 사람일수록 더더욱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효자면 효자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를 위해서 어려운 자리에서 신명을 다할 수 있으면 그 자리가 비참하면 비참한 자리일수록 더 높은 효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고통이라는 것은 두 종류가 있는데, 개인에 한한 고통은 개인으로서 사라져 버리지만 전체를 위해서 당한 고통은 영원히, 그 전체가 없어질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면 국가를 중심삼고 전통을 남기려고 하고, 세계면 세계의 역사 앞에 인류들이 따라가야 할 전통을 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전통은 어디에서 세워지느냐 하면 공적인 어려운 자리를 거치는 데에서 비로소 역사적 기준이 설정되어 나오는 사실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만민을 위하여, 보다 참을 위해서 공적인 전체 앞에 자기의 생명 전체를 투입하여 조금치의 자기도 부정하고 간 그런 어려움의 자리는 온 인류가 그 사람을 추모하지 않고는 지나갈래야 지나갈 수 없는 하나의 원점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은 자연히 역사시대의 추모의 대상으로서 후대 인류가 가야 할 전통의 길을 남기고 간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생살이에 있어서 남는 것은 기쁜 일, 슬픈 일,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 가운데 남는 것이 그런 일들이라면 그런 인생살이를 세계 만민과 공동적으로 합하여 연장시켜 놓는 것이 우리의 인류역사이기 때문에, 인류역사에 남는 일들은 어떤 것이냐 할 때, 이것도 우리 인간에게 남아지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역사과정에 가장 오래 남아지는 것은 어떠한 것이냐? 지극히 어려웠던, 역사시 대에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사건들이 가장 오래 남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을 두고 볼 때, 그 다음에는 어떠한 것이 남아지느냐? 제일 슬펐던 일입니다. 기가 막히게 슬펐던 일이 우리 일생에 잊혀지지 않고 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시대에 지극히 슬펐던 일은 남게 마련입니다. 그 남는 것은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슬퍼했던 일이 아니라 공적으로 슬퍼했던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간 사람들이 역사와 더불어 남는 것입니다. 요걸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중심삼은 어떠한 슬픔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개인의 일생에 남아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자기 일생과 더불어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슬픔을 갖고 가는 사람은 자기는 죽더라도 세계역사와 더불어 남더라 이거예요. 이것은 불가피한 사실이예요. 세계 인류를 위하여 그 세계 인류의 슬픔을 대신 책임지고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면서 악한 세계의 슬픔의 여건을 제거시키기 위하여 싸움을 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일수록, 죽는 데에서도 자기를 잊어버리고 비참 하게 죽어가는 사람일수록 그는 역사 시대의 슬픔을 대표할 수 있는 대표자로 남아진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과 같은 양반이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이냐? 기쁜 일이 남아집니다. 여러분의 일생에 있었던 기쁨이 남아진다 이거예요. 대다수의 인간들은 자기 개인의 기쁨을 생애의 표준으로 삼거나 혹은 생활의 지향선으로 삼고 있지만 우리의 인류역 사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기쁨을 중심삼고 살아간 그 기쁨은 남아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개인의 일생이 끝나게 될 때 그것으로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 세계 인류를 대표해서 기뻐할 수 있는 그 자리를 추구했다면, 또 그 자리를 남겨 놓기 위해서 기쁨의 한 생활 형태를 갖추어 갔다면, 그것이 공적인 생활이면 공적인 생활일수록 그 기준은 인류역사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양반들은 이 땅에 와서 누구보다도 고생을 했고, 누구보다도 슬픈 생활을 했지만 그 마음 가운데는 기뻐하려고 했던 그 기쁨이 인류와 더불어 있기를 바랐고, 역사 이전부터 역사 이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기쁨이 미쳐지기를 바라고 또 그것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생명을 다 바쳤고, 그것을 위해서 갖은 희생을 다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예수님이 일대의 지성을 투입했기 때문에 그 목적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먼 미래의 시대에 있어서 먼 후대의 여명의 한 때를 맞이할 수 있는 역사시대로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인류와 더불어 그러한 길을 추구해 나왔기 때문에 하나에서 둘, 둘에서 계속 수를 가하여 하나의 씨족으로부터 하나의 민족을 넘어 하나의 세계적인 기독교 문화권을 형성해 나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죽은 예수님이 힘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죽은 예수님이 그 길을 수습해 줘서도 아닙니다. 천륜이 그렇고 하나님이 있는 한 그렇게 안 될 수 없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은 있는 것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기쁨의 그 뜻을 바라보며 노력하다가 죽어갔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