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집: 내일을 맞자 1970년 07월 1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21 Search Speeches

참된 내일을 맞으려면

우리 인간은 현실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지만, 영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을 초월한 권내에서는 이것이자 저것이요, 저것이자 이것인 것입니다. 영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반영되어 들어오는 관계의 세계에 있어서는 슬픔과 기쁨이 언제나 나를 중심한 하루의 생활을 통해서 접선돼 나가는데, 오늘 우리들은 이것을 감지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고, 너무나 부족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일을 맞자', `참된 내일을 맞자'라고 할 수 있으려면 참된 나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내일이 나와 더불어 관계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 제일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체휼적인 신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체휼적인 신앙이란 하나님이 슬퍼할 때 나도 슬퍼하고, 하나님이 기뻐할때 나도 기뻐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나는 매일 매일 그런 생활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풀어 드리고 세계 앞에 기쁨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었다 할진대는 나로 말미암아 세계는 수습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성인들을 보면, 그 사람들은 당시대에는 배척을 받았지만 그들이 남긴 도(道)는 역사를 수습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거리를 두고 수습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일체화하면 거리를 초월해서 수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주체와 더불어 시대의 환경을 극복하여 비약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새롭게 개혁될 것입니다.

그로부터 가해지는 파장은 온 세계 인류와 과거 현재 미래의 세계까지 파급되어 나갈 것입니다. 또한 그때의 기쁜 사연은 세계를 소화하고 세계를 감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의 기도는 감화시킬 수 있는 능동력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 경지를 찾아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체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이런 체휼적인 사랑을 제일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자리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어디일것이냐 하는 것을 연구해 봅시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는 문제는,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이 부모라면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런 마음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상대적인 자리에서 하나님대신 그 사랑을 널리 만인류에게 적용시키는 자리, 그런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아들딸이 어려움을 당할 때는 만인을 희생시키더라도 자기 아들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을 가집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냐?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만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딸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지금의 마음을 어떻게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돌려 잡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동기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기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가 제사를 드린 것은 미래의 후손을 위하여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제사를 드리게 된 동기인 것입니다. 미래의 후손을 위하여 자기 자식을 잡아 제사드리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비장했겠는가?

현재보다 미래의 세계를 위하여 자기 아들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 제사드릴 수 있는 사람은 미래의 승리의 기반을 현재에 끌어들일 수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들을 미래의 세계를 위해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나기의 아들딸을 사랑하기를 그 시대의 무엇보다도 미래의 어떠한 무엇보다도 사랑하지만, 만민을 그 아들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기에 자기 자식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