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집: 해원성사 1971년 01월 0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70 Search Speeches

'하나님이 네 아버지냐'할 때 그렇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

여러분이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그때 옆에서 누가 `야 이녀석아. 뭐가 하나님 아버지야'라고 한다면 거기에 여러분은 당당히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럴 자신 있습니까? 또 `야 이 녀석아, 하나님이 보여?' 할 때 `글쎄,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이지 뭐' 해서는 안 됩니다.(웃음) 그렇게 하는 녀석이 하나님의 아들이예요? 그게 하나님의 아들의 꼴이 됐습니까? 아들과 부모와의 관계는 원자탄을 퍼붓고, 천하의 모든 힘을 일시에 투입시킨다 해도 부정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가지를 자르려 하면서 `이 녀석아, 그래도 네 아버지야?' 할 때 `아 잠깐' 하는 사람이 아들이예요?(웃음) 아들이 그래요? 모가지를 잘라서 열 동강이를 낸다 하더라도 내 아버지가 틀림없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그 잘 모르겠는데….' 그래 가지고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면 그거 잘 불렀어요, 못 불렀어요? 그렇게 대하는 아버지는 사촌의 아버지, 의붓 아버지도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지어 놓은 행복의 동산인 천국에는 먼저 가서 살겠다고 야단하고 있으니 이들이 가짜라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는 거기서부터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핏줄이 틀려졌습니다. 아버지가 둘이 생겼으니 핏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탄도 틀림없이 인간의 아버지입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 사탄이는 뭐냐?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세밀히 설명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뭘 하려고 사람을 만드셨느냐? 영원히 같이 살려고 만드신 것입니다. 좋은 것 중에는 봐서 좋은 것이 있고, 먹어서 좋은 것이 있고, 만져서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먹어서 좋고, 보아서 좋고, 만져서 좋은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진짜좋은 것은 영원히 가지고 살면서 좋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이 점포 앞에 가게 되면 좋은 것이 참 많지요? 그것을 볼 때는 기분이 참 좋지요? 그러나 보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가지고 살면서 좋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삼고 보면 하나님도 나를 닮았기 때문에, 좋은 것을 가지고 살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일 좋은 것이 있으면 안방에 갖다 놓고 싶어요, 창고에 갖다 놓고 싶어요? 「안방에요」 제일 좋은 것은 틀림없이 안방에 갖다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제일 좋은 분이니 누구나 자기 집 안방에 갖다 놓으려 할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형제들이 훔쳐갈 것 같아 안심이 안 되면 어디에다 숨겨요? 허리춤에 숨기는 것입니다. 보물을 가진 사람들은 주위에 도둑들이 득실거리면 장롱에 자물쇠를 열 개씩이나 채워 놓고도 안심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것을 허리춤에 달고 다녀야 안심을 합니다. 그렇게 해도 훔쳐갈까봐 걱정이 되면 그 보물을 뱃속에 집어 넣을 수 있으면 집어 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또, 인간이 도둑놈의 왕국에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뺏길까 봐 뼈속에라도 집어 넣고 싶어하는 것은 제일 귀한 것을 보호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제일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어디에 갖다 두려고 하시겠습니까? 「품속요」 그렇지요, 품속입니다. 품속 중에서도 어느 품속이예요? 마음의 품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네 마음에 있고 하나님은 네 마음에 있나니라' 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보물 중의 보물이니 그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내 마음에 갖다 놓으면 내 마음을 누가 주관하느냐? 뭐, 내 마음이 나를 주관하지…. 그래요? 우리가 생활을 통해서 어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 마음이 좋더라. 혹은 나쁘더라'고 말을 하지요? 본래 사람은 마음이 몸을 지배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 속에 들어가 있으면 어때요? 하나님이 내 마음보다 못해요, 나아요? 「낫습니다」 그 나은 가치를 장식하고 싶고, 그 나은 가치를 나타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인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소원이 무엇이냐? `하나님, 내 육신을 당신의 소원대로 써 가지고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놀음을 하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내 육신의 주인이 되시고 나는 그 주인의 명령을 듣는 몸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자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자 나요, 내 육신이자 내 마음의 상대요, 내 마음이자 하나님의 절대적인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천지 통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되는 것을 꿈꾸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 시조인 아담 해와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했느냐? 아담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고, 해와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셔서 `너와 나와는 싸워 가며 패권다툼할 것이 아니라 천정으로 하나되자' 해 가지고 하나됐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중심삼고 하나됐어야 한다고요? 「하나님요」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힘을 지배할 상대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이 태어났더라면 천하는 태평왕국이 아니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의 마음에 무형의 하나님이 완전히 보물 주인으로 강림하시어 아담이 표시하고 싶고 나타내고 싶은 무한한 가치권을 형성하게 되면, 몸은 마음의 상대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담의 소원은 하나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전서 3장을 보게 되면 타락한 죄인 떼거리, 용서받을 수 없는 부정의 요인으로 화한 인간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저 3:16)'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할 수 있는 집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그렇다 할진대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어땠겠습니까? 본래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체를 쓴 하나님으로 나타나기 위한 존재가 인류의 선한 시조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분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몸과 하나된 가운데서 주고도 또 주고 싶고, 주고도 또 주고 싶어하니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발동기가 돌아가는 것처럼 돌고 또 돌아 완전히 통일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종자를 뿌렸더라면 그러한 종자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이므로, 그 씨는 아무리 쪼개어 보아도 그러한 내용을 갖춘 종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뜯어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시 모셔들여 가지고 종자를 개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