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집: 하늘편에 서자 1968년 06월 0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10 Search Speeches

하나님과 책임분담과 나

여러분은 제삼자의 입장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책임분담과 나' 이런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책임분담을 하기 위해 올라가던 과정에서 그 책임분담을 어기려 할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여러분은 축구경기를 많이 해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편의 볼이 센터 라인을 넘어서면 좋아서 `야!' 하고 소리치지만 볼이 센터 라인을 넘어 자기편으로 오면 마음이 얼마나 초조합니까? 구경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림픽같이 그 경기가 크면 클수록, 그 배후의 인연이 크고 내용이 넓으면 넓을수록 초조감은 거기에 비례해서 커지는 것입니다. 국가 끼리 대결할 때는 그 순간이 아주 심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공을 차더라도 정성을 다해서 차야 합니다. 한번만 잘못 차면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그런 경험을 해 보았어요? 공은 단번에 들어갈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상대방이 공을 차서 공이 들어가려는 찰나에 골키퍼는 있는 정성을 다하여 공을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멍청하게 다른 곳을 보고 있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그러나 축구에서는 그까짓 한 고울 먹으면 다음에 다시 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 앞에 놓여진 책임분담은 한번 잘못하면, 억천만세 동안 인간에게 암이 될 수 있는 무서운 구렁텅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해야 할 입장에 있는 아담 해와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공박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따먹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걸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래 태어나기를 저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지. 잘한다 잘한다' 하고 후원했겠어요? 그런 입장에서 저끄러지는 경각에도 하나님은 너만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염려하는 마음이 두 갈래 길에서 얼마나 뒤넘이쳤겠어요? 타락 직전에 가기까지 인간의 권위를 얼마나 주장하고 싶었겠어요? 그 권위를 세워 가지고 사탕을 굴복시키고 싶으신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어요? 이렇게 애 닯은 자리에서 인간은 타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년간의 한으로 탕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억천만세에 수많은 억조창생이 전부 죽음의 고비에 걸릴 함정이 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셨으니 얼마나 분했겠습니까? 그러한 비참한 상처를 입힌 인간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은 할 말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에서도 환갑이 넘어 낳은, 즉 만득자인 7대 독자가 죽는다고 생각 하면 절망 중에 절망일 것입니다. 젊으면 또 낳을 수 있지만, 만득자로 태어난 그 7대 독자가 잘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면 7대권을 계승하려던 조상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타겠어요?

조상들은 자기의 후손, 자기의 핏줄을 통해서 세계에 없는 만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자식이 죽는다면 그 부모는 따라 죽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7대 독자가 아니 영원한 독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담을 중심삼아 가정을 이루게 하여 천지의 대업을 세우려 하셨는데, 그 아담이 죽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렇게 일이 틀어졌을 때, 어떠했겠어요? 내가 결혼하고 싶은데도 결혼 못할 때의 그 안타까움에 비교되겠어요? 부모는 천년 만년 같이 살고 싶은데 7대 독자가 지금 몹쓸 병에 결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어요? 여러분의 아들딸이 지금 숨이 넘어가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부모가 소리치겠어요, 안 치겠어요? 그 부모는 죽어가는 자식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체면과 위신을 다 버리고 그 방법을 쓸 것입니다. 어떤 원수가 있어 그의 영원한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의 아들딸을 살릴 수 있다면 부모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해가 됩니까? 그 자식을 살리는 어떤 방법이 있다 할진대 부모는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식을 살릴 수 있다면 부모가 종이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한날의 뜻을 세울 수 있는 그 한 실체인 아들을 찾기 위해서는 천만년의 한을 푸는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도 그러하거늘 하나님이야 오죽 하시겠습니까? 그런 아들딸이 접경을 넘어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비참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성교회에서 말하듯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기는 쉽지요. 그러나 그렇게 간단할 것 같으면 이렇게 복귀섭리역사가 6천년이나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참한 검은 구름이 끼는 환경으로 접촉해 들어가는 자식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큰 상처를 입으셨겠습니까?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들이 왔다 갔으나 지금까지 그러한 상처를 입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 고비를 넘어 갔지만 그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곳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