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집: 승한일(Ⅰ) 1974년 05월 0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30 Search Speeches

기독교의 반대로 말미"아 최하의 자리-서부터 시'된 통일교회

한국은 그때 어떤 입장이었느냐? 이스라엘 나라와 기독교가 영육을 중심삼고 사탄권에서 지배받으면서 싸워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40년간 육적인 면에서 원수에게 지배받으면서, 영적인 면에서 이 나라를 위해서 생명을 바칠 것을 각오하는 무리를 중심삼아 가지고 독립운동을해 나왔습니다. 이러한 정기(精氣)를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은 섭리의 인연을 세워 나오셨다고 우리는 봐야 되는 거에요. 그리하여 민족을 규합하고 결속시켜 가지고, 기독교를 위주한 사람들이 주동이 돼 가지고 나라를 세우게 됐다 이겁니다. 그렇게 기독교 신자들이 영적인 면에서 왜정 40년 탄압 가운데, 나라도 없는 가운데 죽음길을 자진해 가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충절의 도리를 세웠다는 것은 섭리사적으로 중대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반에서 이 박사를 중심삼아 가지고 한국에 주권이 설정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때에 25, 26세의 젊은이로서 이 나라의 고위층의 사람들과 손을 잡고 출발하려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그때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를 중심삼아 가지고 전반적인 기반을 갖고 출발하려던 것이 퉁그러짐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기준에서 출발해서 세계적 무대로 가려던 것이…. 만일에 이 박사와 그 일파 몇몇 사람만, 세 사람에서부터 열 두 사람까지만 결속됐더라면 그때 반드시 민주세계의 주도 국가인 미국이 이 나라에 연결돼 가지고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 기준만 되었더라면 미국을 중심삼고 세계적 무대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었을 것인데, 이 세 사람에서부터 열두 사람까지를 중심삼고 최고 회의에서 그 구성을 하지 못하고 반대가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통일교회는 높은 자리에서 반대의 자리인 땅으로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핍박의 화살이 전체에게 퍼짐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이 분립역사로 북한, 하나님을 반대하는 원수의 나라에 가서 남한 땅에서 잃어버린 충신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몇몇 하늘의 사람을 찾아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끌려가 가지고 옥중 생활을 거쳐 십자가에서 죽어갔기 때문에, 복귀노정에 있어서도 옥중에서부터 출발해야 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서 출발하려 했던 모든 길이 반대로 십자가의 노정으로 전개됐기 때문에, 통일교회 역사는 옥중의 출발로부터 새로운 차원으로 전진되게 되었다 이겁니다. 예수님이 감옥에 있을 때 열 두 제자를 잃어버린 것을 실체적으로 복귀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입을 다물고 있더라도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통하여 잃어버린 수의 기준을 찾는 데 영계 전체를 동원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박정화니 김원덕이니 하는 24명의 멤버들이 암암리에 옥중에서 천명(天命)에 의해서 결속되어 출발한 거예요. 감옥에서 나올 때 세 사람이 내 뒤를 따라 나섰던 것은 사위기대 복귀원칙에 있어서 모든 원리원칙에 일치되는 역사적 조건을 하나님이 세워 놓은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 감옥에서 나와 평양에 가서 옛날에 잃어버렸던 식구들을 다시 규합해 가지고 출발한 것이 현재의 통일교회입니다.

그러면 남한에 내려와서는 어디서부터 출발했느냐? 최고의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최하의 자리에서 출발한 거라구요. 이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몰리던 기독교인들이 로마를 향해 들어가게 될 때, 영광의 자리에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최하의 자리, 로마제국의 지하를 타고 들어간 것과 같이, 오늘날 통일교회는 비참한 자리에서 가려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 자신이 부두 노동으로부터 출발해 가지고 그러면서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야 할 것이 선생님의 일생의 운명의 길입니다.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국가가 반대하는 차원에서 다시 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알다시피 1956년 이후에 전 국가의 반대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전체가 반대한 거예요. 누가 한 사람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는 이북에 있었기에 모르지만 처자 할 것 없이 그 누구 동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겁니다. 전체의 반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반대는 개인적으로 반대하더라도 개인적인 반대가 아니라 세계사적인 개인을 대표한 것이요, 가정적인 반대면 가정에 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이면 민족이 그 하나의 민족이 아니고, 교회면 교회가 그 하나의 교회가 아니었고, 나라면 나라가 그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전체 세계를 대표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홀로 싸워 가지고 개인적인 승리의 팻말을 꽂지 않으면 갈 길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3년노정의 길을 다시 추어 올라가서, 전체 민족이 반대하더라도 낮은 데서부터 추어 올라가서 그 나라의 교권자들과 주권자들이 예수를 맞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최고의 반대를 받으면서 싸워서 승리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가정적 승리 권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예수의 길이었습니다. 만약 찾았더라면 가정적 승리권을 찾은 그 다음에서부터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기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인 십자가 도상에서 몰림으로 말미암아 그 고개를 못 넘고 십자가에 돌아간 것이 예수가 간 길이었습니다.

선생님도 그와 같은 정상적인 길을 가야 할 것이었는데, 기독교가 반대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에서 기반을 못 닦고 기독교에 발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기독교인들은 공연히 미워하는 거라구요. 이것은 역사적 사탄이 총발동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화살을 집중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구요.

그래서 이화여대 사건이 문제 되어 가지고 1957년도 이후부터 1960년도까지 3년 기간에 반대가 최고도로 고조되었던 것입니다, 그 기간은 아무리 나라가 반대하고 아무리 내가 쇠고랑을 차고 죽음길을 간다 하더라도 단연코 생명을 내걸고 투쟁해야 할 기간이었습니다. 그것이 1960년도까지였습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1959년 하반기에서부터 1960년도 4월이전까지 한 7개월간이 최고의 수난기였습니다. 그 기간에 있어서 우리 통일교회를 믿다 나간 사람들이 - 예수를 열 두 제자가 반대한 것과 마찬 가지로- 결속돼 가지고 반대해 나온 거라구요. 지금까지 그것을 원리적으로 보면 참 무서우리 만큼 맞아 나왔다는 거예요.

이러면서 내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내적 사탄, 외적인 면에서는 외적 사탄이 합동으로 싸움을 하는 그 제일 복잡한 와중에서 1960년도 4월 11일, 음력 3월 16일에 성혼식을 한 것입니다. 그때는 그야말로 최고의 정상의 자리에서 그 일을 한 거라구요. 아무리 십자가의 핍박이 많다 하더라도 내 자체는 철석같은 신념을 가지고 모든 반대의 환경을 짓밟고 그날을 맞이한 것이 1960년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차원이 달라져 가지고 한 고개를 넘어간 거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