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집: 성탄일을 맞이할 사명 1966년 12월 2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93 Search Speeches

예수의 탄생을 위한 터전을 마련해 "지 못한 이스라- 민족

그러면 우리 교회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1월 3일을 지키느냐? 이것은 우리가 신령한 영계에 들어가 가지고 예수님과 대면해서 문답한다든가 해서 그 결과로 그날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 식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크리스마스는 1월 3일, 틀림없는 1월 3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지켜 오고 있습니다. 몇 해 동안은 그 날로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사회의 풍조라든가 혹은 세습적인 그 인연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지방교회면 교회의 자의에 맡겨서 오늘 이날을 기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부에서는 세상의 일반 교회처럼 외적인 단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간소하게, 도리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자리에 우리들이 모여 이날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신 확정적인 내용과 통할 수 있고, 예수님을 그런 자리에 눕게 하신 하나님의 심정과 도리어 가까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준비하는 것을 제재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여러분에게 '성탄일을 맞이할 사명'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약 2천 년 전, 여기 성경 말씀에 나와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베들레헴 성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비록 그 순간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한 개인으로서 태어나는 시간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우리 인류에게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광명의 날이 찾아질 수 있는 것이요, 이 날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지상에서 소원의 한 터전을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날을 세우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고 수많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메시아를 보낸다는 것을, 즉 구세주를 보낸다는 것을 수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이스라엘 민족을 그 날에 표준하게 하고 온갖 소원을 그 날에, 온갖 희망을 그 날에,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그 날을 중심으로 해서 연결되게끔 몰아왔던 것입니다. 어떤 편안한 환경에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서 그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 날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방 나라 사람을 동원하여 쳐서라도, 외로운 자리를 거치게 해서라도 그 날을 마음 깊이 그리워하고 생각할 수 있게끔 몰아왔던 것입니다.

또한 성경 여러 곳에다가도 메시아가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을 예언해 놓았기 때문에 성경을 숭상하던 그때의 서기관 바리세인들은 어느 곳에서 태어날 것도 알았습니다. 더우기 자기들이 소망하던 메시아요, 이스라엘 나라를 세계적인 국가 형태로 전개시킬 수 있는 책임자로 믿었기 때문에 그 소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을 맞이할 수 있는 스스로의 준비는 어떻게 되어 있었느냐 하면, 그 소망의 기준 앞에 일치될 수 있는 내적 심정의 기준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들레헴 도성에는 수많은 집이 있었을 것이며 거처할 곳이 많았을 것이지만 갈 곳이 없어 외양간에서 예수가 탄생한 그 입장과 환경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 그러한 환경을 맞게 한 것을 본 하나님, 예수가 탄생한 그 장면을 바라보는 하나님 자신에 있어서의 내적인 사정은 말할 수 없이 서글픈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만민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하늘의 황태자께서 이와 같이 비참한 자리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호화찬란한 환경을 지니고 만민이 환영하는 가운데서 탄생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고, 그러하여야 할 그날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환경을 갖추지 못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바라던 소망의 실체가 머무를 수 있는, 혹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바라보게 될 때, 소망한 바는 간절하였으나 직접적으로 대할 수 있는 스스로의 준비와 태도는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틀림없이 온다는 것은 민족 전체가 알고 있었으되 그 민족이 오시는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준비는 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이스라엘 민족 전체, 더더우기나 틀림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아는 그 민족이요 교단이었더라면, 책임진 교법사들은 남이야 어떻든간에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를 거국적인 행사로 준비라도 해 놨던들 메시아는 그와 같이 말구유에 눕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에 어느 누가 오실 메시아를 위해서 방을 한 칸 마련한다든가, 혹은 그가 계실 수 있는 생활적인 환경을 마련할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었던들…. 헤롯왕 앞에 동방박사를 통해서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것이 보고될 때, 온 예루살렘 성전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이 소문은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들었을 것인데도 그 메시아를 찾아 모시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게 될 때, 소원의 기준이 마음으로는 간절했지만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스스로 해야 할 준비의 터전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부정할 수 없이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환경을 바라보면서도 약속한 때는 이르렀기 때문에, 지상의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메시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은 때를 맞추어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은 몽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가르쳐 준 모든 사실을 진정 그 마음에 품고, 태어날 그 아들이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구주요 만민의 메시아로 온다는 것을 생활과정에서 절절히 체험하고 느꼈다면, 성경 말씀에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동방박사의 증거함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지난날을 회상하여 그 마음에 예수 탄생을 명심했지만, 요셉은 여기에 대해 모른다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하늘의 명령을 받고 직접적인 사명을 짊어진 부모마저 하늘의 기준 앞에 합당한 부모의 자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만삭이 되어 해산날이 언제 올지 모르는 마리아와 요셉은 거기에 대비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베들레헴 성을 찾아가게 될 것 같으면 거기에 사람을 보내서라도 여관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베들레헴을 찾아가 가지고 호적하러 온 수많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여관마다 다 찼기 때문에 갈 곳이 없어 마구간에서 하룻밤을 새우는 기간에 예수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요셉가정 자체가 하늘이 바라는 바에, 하늘의 황태자를, 독생자를 보내는 심정 앞에 스스로 맞이할 수 있는 책임을 다 했느냐 할 때 책임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자신도 그랬고, 요셉 자신도 역시 그랬고, 그 환경에 처해 있는 친척도 역시 그랬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