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집: 하늘은 심정으로 모시는 자의 것 1960년 02월 1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05 Search Speeches

심정의 세계

심정이 앞놓아 가는 곳에는 사람을 끌어 들일 수 있는 조화의 법도가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심정은 거리와 공간을 초월하여 자식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 현상인데 초자연적으로 일어나요. 심정에 사무치면 그렇게 돼요. 그러한 심정은 우주를 포괄하고도 남습니다. 그러한 심정으로는 예수도 끌어올 수 있어요. 그런 심정에 사무치게 되면 관계가 없는 주님같지만 관계되어 있는 형태로 나타나고, 인연이 없는 것 같은 주님이 인연을 갖추고 나타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를 만나게 될 때에 주가 어떻게 할 것인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 준비하고 갖추어서 모심의 생활은 이렇게 저렇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랑이 신부를 찾아나오기 위한 편지체로 쓰여진 성경의 말씀에는 암호가 많습니다. 왜 암호로 말씀했는가? 심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누구나 다 풀지 못합니다. 못 풀어요. 신랑 신부만이 풀 수 있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모실 수 있는 준비를 한 자만이 풀 수 있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못 풀게 돼 있어요. 여기에 있는 암호의 정체가 무엇이뇨? 신랑이 올 수 있는 문을 여는 비결인데, 그 비결은 무엇인가. 심정입니다. 부모의 심정은 어린아기를 품고 젖을 먹일 때나 그 자식의 머리가 세어서 백발이 되었을 때나 같습니다. 그 심정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성경에 숨어 있는 모든 심정의 근원을 헤쳐내야 되겠습니다.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데는 학박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암만 해석해도 학설은 지나가고 지나갑니다. 심정은 논리로써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론으로도 체휼할 수 없어요. 체계로써 방향을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심정은 천륜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이란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심정의 흐름과 느낌을 갖고 해석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학박사가 주장하는 현대의 신학사조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심정의 세계는 지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왈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합니다.

심정에는 지나갈 수 있는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정이 있는 곳은 주님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지나갈 수 없습니다. 성신도 지나갈 수 없어요. 역사적인 철인(哲人)도 지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심정적 인연을 갖춘 민족일수록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는 거예요. 민족정신이 나라를 위하는 심정의 선(線)에 가까이 스며들어갈수록 그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분립되고 분산되는 때에는 천륜이 지나가니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편단심의 동기가 되는 것은 심정입니다. 일편단심, 그것은 결과입니다. 일편단심이란 명사를 세우기 전에 심정, 이 심정을 지닌 자라 할진대 그는 하늘과 떨어진 지상에 있을망정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불행한 자리에 처하여 있을망정 행복한 자리에 있는 것임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심정을 갖추어가는 과정에 있다 할진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러분이 아브라함 앞에 나타날 때 '아브라함아, 너는 이러이러했구나'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인은 저나라의 아브라함에게 직접 명령도 합니다. 모세에게 명령도 합니다. 12사도에게 명령도 합니다. 심정세계에서 반응된다 할진대 지금부터 4천년 전의 아브라함을 그 심정세계에 몰아넣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모세도 그렇고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사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들은 심부름꾼입니다. 사도를 대하여 신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와 신부, 누가 더 높은가. 신부가 높습니다. 사도가 신부 앞에 머리를 숙여야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