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집: 전통적 생애 1971년 05월 01일, 한국 중앙수련원 Page #250 Search Speeches

선을 위해 살려" 사람은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한다

이제부터 말을 해봅시다. 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고는 있으되 이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선한 개인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이요, 선한 가정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이요, 선한 종족, 선한 민족, 선한 국가, 선한 세계를 위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위해서 살려고 하는 분야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거기에는 수난의 길이 가중되는 것이요, 슬픔의 길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서 살려면 개인을 극복하기 위해 사는 것보다도 더 큰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이요, 종족을 위해 살려면 가정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욱 배가된 십자가를 져야되는 것입니다. 또한 민족을 위해 살려면 종족을 위해 사는 것의 몇 배, 혹은 몇십 배, 몇백 배 가중된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또. 나라를 위해서 살려면 민족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욱 배가된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라보다도 세계를 위해 살려고 할 때는, 그 나라에서 당한 십자가에 몇백 배, 몇천 배 배가된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피하고자 하는 사람은 세계를 위해, 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은 세계를 위해 사는 사람 이상의 십자가의 길을 더듬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내 것으로 하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역사과정의 어느누구보다도 수난을 겪어야 하고 고통을 받아야 하고, 지긋지긋해 보이고 다른 사람이 곁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일생 동안 비참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길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에, 이와 같이 살아간 무리들로 말미암아 참이 출발하였고, 이와 같이 살아온 그 역사적 전통으로 말미암아 참의 역사가 우리 후대의 인간들 앞에까지 상속되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를 두고 보면 세계의 4대 성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성인은 바로 예수, 석가, 공자, 마호메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그 당시의 사회환경에 보조를 맞추며 생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석가 같은 양반은 정반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의 영광스런 권위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전부 부정해 버린 것입니다. 좋은 환경을 떠나서 반대의 환경인 설산에 들어가 수도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또, 노나라 시대의 공자라는 양반은 동네에서 개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냄새를 잘 맡는다는 거예요. 좋지 못한 일들은 전부 알아 가지고 그것을 충고하고 비판하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부정적인 여건을 제시해 가지고, 그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그런 명칭까지 남겼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부정적인 입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렇지요? 태어날 때부터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생활하는 것도 여느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전부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친척은 물론이요, 자기의 사랑하는 동생까지도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그의 어머니까지도 그를 불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어머니에게 '여인이여! 너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할 수 없는 최고의 욕설을 퍼부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부모가 가는 길과 자기가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증거하는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그 당시의 사회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움직였습니까? 빌라도 법정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한 예수, 욕설을 퍼붓고 비웃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옳다고 변명했더라면 죽음을 면할 수도 있었는데,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 변명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던 예수, 그는 전부 반대적인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것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서 죽은 것도 아니요,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나라를 정복하려다가 반역자로 몰려 죽은 것도 아닙니다. 소망의 나라를 그리워하면서, 소망의 민족을 그리워하면서, 소망의 생활을 그 마음에 두고 그것이 실천되지 않는 생활환경을 부정하다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무원리의 환경에서 몰려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선한 사람은 그런 유의 사람들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환영받지 못한 내용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입체성을 띠고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역사적인 인물로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게 될 때에, 지금까지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