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집: 인내와 극복 1971년 05월 2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53 Search Speeches

못 믿을 것을 믿" 것이 위대한 믿음

여러분. 사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 사탄이 있는 것 같지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 하나님이 있는 것 같지요? 그렇게 믿어 가지고 생명을 내놓을 수 있어요? 내놓을 수 있다면 그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런 것 같은 것을 사실로 믿고 행동하는 사람은 지극히 미욱한 사람이 아니면 지극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것은 왜? 만일 어떤 사람이 막연히 같은 것 같은 것을 사실로 믿고 죽는 자리까지 갔다면, 그렇게 내몬 주인이 있다면, 그 주인은 그 사람을 영원히 심복부하로 삼을 것입니다. 결론이 그렇잖아요. 바보 중의 바보 같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같은 것 같은데 사실로 믿고 했다 이겁니다. 사실로 믿고 한 그것이 그 누구도 탄복할 수 있는 일이라 할때 주인은 그 사람을 영원히 심복부하로 삼으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은 것 같은 것을 믿어라 했는데 그것을 믿고 행동했다 할 때, 그리고 그 행동한 것이 하나님보다도 멋지다 할 때, 하나님은 그를 영원히 심복부하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믿고 우러러 모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한계가 어디냐? 인내적인 믿음, 극복적인 믿음의 한계가 어디까지냐? 하나님을 타고 앉는 자리까지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상투 끝에 올라가 춤을 추더라도 하나님이 좋아하며 어서 춤추어라 할 수 있는 자리까지입니다. 그 자리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지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용만 뒷받침된다면 믿지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탄을 잡기 위해서는 사탄 이상의 수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사탄을 잡으려면 사탄 이상의 수법을 써야 합니다. 사탄이 하자고 하면 하나님은 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작전이 있어야 합니다. 사탄이 '아이구, 나 손들었어' 해야지. '내가 현재 하나님보다 낫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것이라 하더라도 선을 보다 가치 있게 증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인정하겠다' 하나님은 이렇게 보시는 것입니다. 악이 그 반대적인 선을 자극시킬 수 있는 자극제로 쓰여진다 할 때는 그 악을 악으로 취급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어떤 사람이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본 사람은 거기에 가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안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법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하나의 길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한 자리를 갖지 못한다면 사탄을 영영 정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자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나서라는 거라구요.

앞으로 세계적인 신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의 그 누구도 무시 못할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을 생명시하고 간 신앙자가 누구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하늘 뜻과 관계되어 있는가를 파헤쳐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상적인데….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무시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게 타당한 것이라구요. 나와 다르기 때문에 손가락을 보더라도 더 많기 마련이라구요.

나는 손가락이 다섯 개 있는데 하나님은 손가락이 여섯 개 있다고 하면 하나님은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정말이라고 알면 된다구요. 간단하다는 거라구요. 나 자신이 하나님과 똑같다면 나는 그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복을 받고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내가 가진 다섯 개 이상의 손가락을 가졌기 때문에, 그 나머지 손가락으로 복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적용시킬 수 있고 타당화시킬 수 있는 자신이 되려고 해야지. 그것을 부정하고 비판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죽기까지 해보라는 거라구요. 죽어 보자 이겁니다. 죽는 데는 잘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 죽어 보자는 것입니다. 죽고 난 뒤에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내 일이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살리겠다고 하신 약속을 깨뜨리면 하나님이 배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약속 불이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죽었는데 하나님이 그 약속을 불이행했다면 하나님이 나를 그냥 그대로 처박아 둘 것이냐? 아닙니다. 몇백 배 이상의 다른 것으로 갚아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죽으라고 해서 죽었는데. 죽으면 부활시켜 준다고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면 그 대가 이상으로 갚아 줘야 되는 것입니다. 나 하나 죽었는데 나를 부활시키지 않은 대가로 '우리 나라를 살려주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대가로 세계를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나를 죽음길로 내모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못 믿을 것을 믿는 것이 위대합니다. 못 믿을 것을 믿고 행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나선 사나이가 있다면 그는 위대한 사나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장 죽게 되었는데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자기가 당장 죽게 되어 벌거벗겨져 매를 맞으면 '아이구, 아야야야' 그러지, ‘아버지, 아프세요?’ 그래요? 그런데도 예수는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랬습니다. 그것은 ‘나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프시지요?’ 그 식이라구요. 차원이 다릅니다. 이렇게 땅이 아니고 하늘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능동적인 그 주체 앞에서는 못 믿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