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집: 통일식구의 사명 1971년 01월 16일, 한국 부산교회 Page #16 Search Speeches

예수님이 왜 그렇게 되-"가 하" 것은 생각해 볼 문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 기간 중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사도들도 예수님이 죽을 고비에 처하게 되자 다 배반하고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죽은 지 40일 만에 부활했을 때 다시 모여 가지고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러한 무리들이 살기 어려워 못 견디는 환경을 거쳐 나가면서 기록해 놓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사도행전이요, 바울 서한입니다. 전부 다 그러한 놀음을 한 기록이에요. 이게 기가 막힌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기가 막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 처음 온 분들은 자기 자신을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면서 기분 나빠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통일교회는 하늘 앞에 공적인 기관이고 그 책임자가 누구이더라도 공적인 기관의 책임자는 공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일컬어 선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그 예수님이 잘난 사람인지 못난 사람인지를 분석해 보아야겠습니다. 참 심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뭐 소학교도 못 나왔고 달리 배우지도 못 했으니 대학 나오고 박사인 내가 예수님보다 나을지도 모르지'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그분이 역사적인 인물이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이것을 전부다 헤치고 분석해 봐야 할 내용이 많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을 출발하기 위해 집을 나설 때 마리아가 '나죽기 전에는 너는 집을 못 나간다' 하며 매달렸으면 어떠했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했습니까? '하늘의 뜻이 있어 내 품을 통해 나왔는데, 큰 대명을 받아 합동공사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집에 왔는데 어째서 떠나려고 하느냐'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동네방네 소문내던 마리아라고 하는 그런 내용이 성경의 어느 한 페이지에라도 기록되어 있어요?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요셉은 의붓아버지이니까 그렇다치고 어머니인 마리아가 악착같이 울고불고 예수를 따라가겠다고 했더라면 그 아들딸도 '나도 따라갈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밥을 얻어먹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배고플 것을 염려하면서 어머니가 얻어 주고 형제들이 얻어 주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머니나 형제들이 얻어 주는 것이 낫겠습니까, 일자무식의 어부들이 얻어 주는 것이 낫겠습니까? 그때 어부들은 형편없었습니다.

선생님이 베드로의 장인 장모가 살던 집을 가 보니까 뭐 두더지 굴 같더라고요. 형편이 무인지경이었습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의 그 사도들을 내가 안 좋게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높이 알고 있는 이상 나도 높이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대로 엮어내 가지고 해명 하려니 할수없다는 겁니다. 그 밑창을 전부다 밝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물을 깁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베드로야! 그물을 던지고 나를 따르라. 이제부터는 고기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했을 때 베드로가 대번에 따랐던 게 아니라구요. 동네에서 안팎으로 보고 듣고 해서 알았던 거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따랐던 것이지, 누가 예수님을 따랐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능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뜻은 6천년 전에 다 이루어졌게요? 그렇지 않아요?

지금도 바닷가 하게 되면, 팔도의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사는 곳입니다. 뜨내기들이 모여 사는 거라구요. 부산 식구들 기분 나빠도 할수없습니다. 사실이니까. 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할 것 없이 팔도의 뜨내기들이 모여 사는 거라구요. 그러니 지역의 전통적인 풍습도 가질 수 없는 거예요. 사람의 계층으로 본다면 하류계층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니까 아무리 부인해도 그렇다는 거예요. 여기 부산에도 아가씨 들이 많지만 지금도 뱃사람한테 시집가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예」

갈릴리 바다를 실지로 가 보면 사막은 저리 가라입니다. 어찌나 황량하고 스산한지 정 붙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2천년 전 그곳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때 배를 상상해 보세요. 가지고 있는 배 형편이 어떠했겠습니까? 간신히 뒤집어지지 않고 겨우 뜨는 정도의 배였을 것입니다. 이런 배를 가지고 고기를 잡겠다고 그물을 지고 가는 베드로의 신세는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을 데리고 그래도 뜻을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예수님은 얼마나 처량한 입장이었겠느냐는 거예요. 왜 그렇게 되었느냐 이겁니다.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