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집: 통일기반 확보를 위하여 1971년 01월 0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60 Search Speeches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해 나온 통일교회

그때에 나는 김백문씨와 같이 출발하게 되었던 거예요. 김백문씨와 나는 가인과 아벨, 세례요한과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김백문이란 이름이 그래서 나온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뭐 선생님이 김백문의 제자니 뭐니 하는데, 선생님이 그의 제자가 될 게 뭐예요?

그 사람은 기독교의 신앙을 하고 있었는데 기독론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위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근본을 잘 모르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 사람이 신령한 면에서는 당시 기성교회의 최고 신앙 기준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출발하려던 것이 다 틀어져 나가버렸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김백문씨의 수제자들이 전부다 영계를 통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지도하는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영계에서 가르쳐 주기는 전부다 문선생을 따라가라고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김백문씨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수도원이 생기게 되었는데, 거기에 모여든 교인들이 신령한 은혜만 받으면 전부다 문선생을 따라가라고 계시를 받는다는 거예요.

그랬지만 선생님은 거기에 들어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기반에 들어가 공작을 해서 그 기반을 무너뜨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자연적으로 굴복시켜야 되는 겁니다. 공작을 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굴복시켜야 했기 때문에 선생님은 눈물도 많이 흘리면서 모범적인 식구의 한 사람으로서 말없이 지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식구들이 선생님을 따라가려고 결심을 하게 되니까, 여기서부터 문제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평양에 가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온 것입니다.

그곳을 떠난 후 선생님은 기성교회로부터 그 사람들이 반대받던 것을 몽땅 인계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쓰고 있던 누명을 몽땅 인계받은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들과 그런 관계를 맺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누명을 쓰지 않고 나왔을 것입니다. 기성교회의 반대를 받지 않고 정부의 반대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관계를 맺은 연고로 반대를 받게 되어 할 수 없이 이북에 가서 재차 복귀노정을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개인 복귀의 기준을 찾아 세우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남한에서는 사탄이 앞장서서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남한에서 교인 몇 명을 모아 가지고 부산에서부터 전도활동을 시작하여 대구와 김천을 거쳐 서울에 오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자리를 잡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 협회장을 만나 새로운 집에서 협회 창립을 했습니다. 통일교회 역사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정부와 기성교회의 반대를 받으니까 할 수 없이 민족의 낙오자들을 규합해 가지고 터를 닦아 나온 것입니다. 어찌 보면 공산당식이에요. 횡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서, 이 나라로부터 버림받고 기성교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을 규합하고 인생의 낙오자들을 수습해 가지고 나온 겁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그런 사람들을 키워 가지고 1968년까지 서울에서 어떻게 성공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선생님이 작전을 세워 나왔습니다. 1969년 1년 동안에는 우리가 바라던 목표를 백 퍼센트 달성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도를 기점으로 서서히 꼭대기에서부터 우리를 인정하게 됨으로써 한국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벌어질 단계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기성교단과 이 나라가 우리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사랑하고 설득시켜야 했습니다. 이들이 우리의 가는 길을 반대하는 것은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가 예수님 가는 길을 막던 것과 같은 형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그들의 힘을 기반으로 예수님이 가는 길을 막던 것과 같이 대한민국과 기성교회가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과 기성교회가 우리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반대하는 한계권을 넘기 위해서 내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통일기반 확보'라는 표어를 내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