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집: 성탄일을 맞이할 사명 1966년 12월 2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01 Search Speeches

예수가 태어난 순간은 하나님-게" 서러웠던 순간

오늘날 우리들이 그때의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한 번 회고해 볼 때, 사회적 환경이라든가 예수가 탄생하던 그 환경이 하나님이 소망하던 그 뜻과 부합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이 연장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이런 날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역사시대의 슬픔을 다시 한 번 분석하여 앞으로 올 그날을 준비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과 여건을 스스로 갖추어 나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날을 맞이하여 기념하는 모임을 갖는다는 것이 도리어 하늘 앞에 불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마구간에서 탄생하는 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기뻤겠습니까? 아닙니다. 만일 헤롯왕의 아들이 태어난다고 한다면 만조백관이 옹위하는 가운데서, 수많은 백성이 찬양하는 가운데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추울세라 더울세라 온갖 정성을 다 합하여 거족적으로 그 아기의 탄생을 축하했을 것입니다. 또, 그 나라에서는 그날을 축하의 날로 정하여 경축행사를 거행했을 것입니다. 더우기나 로마 황제의 아들이 태어났다면, 지중해 일대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판도를 가지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로마의 왕자가 태어났다면, 얼마나 수많은 민족이 찬양하고 정성을 다하여 예물을 보냈겠습니까? 그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물며 한때에 있어서의 왕의 아들로 태어나도 그러하거늘, 천추만대의 창조주요 만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왕자로 태어난다면 하나님은 그 아들은 얼마나 영광스럽게 맞이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라보는 표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만이 예수를 맞아 주기를 바랐겠어요? 아닙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민족이 거족적으로 그의 탄일을 축하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랬을 것 아니예요? 그런데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없는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얼마나 딱했으면 이방의 점장이를 통해 가지고 이스라엘에 구세주를 증거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통한 일입니다.

유대의 모든 교법사들은 어디 가고 점성술객들이 예수를 찾아온 것을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기쁜 일로 말하고 있는 이 사실이 불경이라는 거예요. 하늘을 위하여 충성을 다짐하고, 시대적인 선각자로서 지도자적인 책임을 짊어진 교법사들,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어디 가고…. 교회면 교회, 이스라엘 나라면 나라, 제사장으로부터 서기관, 교법사가 일체가 되어 찾아와 가지고 수천 년 동안 정성들였던 가보를 예물로 갖추어 메시아 앞에 봉헌하여도 부족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관계도 없는 이방의 점성술객들이 찾아와 가지고 예물을 드렸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모독이요, 하늘나라의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이 하지 못하고 교단이 받들지 못하니, 하늘은 탄생한 메시아를 땅 위에 공개시키고 인간 세상에 있어서 그가 찾아왔다는 조건적인 인연이라도 남겨 놓아야 할 뜻이 있기 때문에, 하늘을 숭상하고 세계적인 위대한 인물이 어디에 태어나는가를 관찰하면서 그를 찾고 고대하던 점성술객들 앞에 다리를 놓아 그들을 통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서러움과 분함, 억울함이 얼마나 컸겠나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생각을 해봐요, 그렇겠나 안 그렇겠나? 뭐 동방박사가 찾아온 것이…. 그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어찌하여 우리 민족은 동방박사 이상으로 하늘 앞에 충성을 다짐하고 스스로 제물된 생애노정을 거치면서 메시아 한 분을 모시기 위해 정성들이지 못했느냐? 그 이상의 사람이 왜 없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그것을 볼 때 메시아가 태어나던 그날이 기쁜 날이었으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유대교단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과 멀다는 것이 증거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4천 년 동안 그렇게 수고하면서 길러 나온 이스라엘을 외적인 중보자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메시아를 모셨다는 자리에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될 하늘의 사연이 여기에 엮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심정적으로 얼마나 괴로웠던 시간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4천 년 하늘의 역사를 총탕감하기 위한 책임을 짊어지고 온 것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운명과 세계사적인 운명을 책임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의 세계에 있어서 새로운 주권국가를 세워,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하여 세계를 통일시켜야 할, 하늘나라를 창건해야 할 책임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자가 태어나는 그 자리가 마구간이라니 이것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 기독교에서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그 자체를 신성시합니다. 그 자체를 신성시한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