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집: 아버지와 그 나라 1964년 03월 2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21 Search Speeches

하나님이 가야 할 길과 부름받은 인간이 가야 할 길

여러분, 성경 말씀(마태복음 25장 35절 이하)을 보면 오른편에 있는 무리를 대하여,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시고 오른편의 의인들을 대하여는 영생을, 그렇지 못한 왼편의 악인들을 대하여는 형벌을 내리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여러분은 단순히 비유와 상징으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없다(마 8:2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준비하여 보낸 메시아가 땅 위에서 이런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메시아를 맞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고 학살을 당해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4천년 역사를 준비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충신이 되고, 효자 효녀가 되고, 열녀가 되겠다고 하는 무리들은 이러한 길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충신의 이름은 있으되 충신으로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고, 효자 효녀의 이름은 있으되 효자 효녀로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고, 열녀의 이름은 있으되 열녀로서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주어서 죽음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길이 막혀 있기 때문에 이 길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신, 효자, 효녀, 열녀가 되기 위해서는 군왕과 부모와 신랑을 대신하여 자기 몸을 죽음의 자리로 내던질 수 있어야 되는 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불림을 받았지만 인간은 인간으로서 갈 길이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갈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는 길에 십자가의 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가는 길에도 십자가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개인적인 사정을 중심삼고 가지만 하나님은 개인사정뿐만이 아니요, 인간은 가정적인 사정을 중심삼고 가지만 하나님은 가정사정뿐만 아니요, 인간은 민족이면 민족만을 위주해서 가지만 하나님은 민족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개인을 넘어서 가정, 가정을 넘어서 종족, 종족을 넘어서 민족, 민족을 넘어서 국가, 국가를 넘어서 세계, 세계를 넘어서 천주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희생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이 십자가에서 승리한 자들을 합하여 가정적인 형태를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이 가야 할 가정적이 십자가를 탕감해야 됩니다. 민족과 민족을 합하여 하나님이 가야 할 국가적인 조건을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진정한 효자 효녀가 되고, 진정한 충신 열녀가 되려면 먼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다 간 후에 하나님이 가는 길을 도와주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업고 가든지 어떻게 하든지 도와 주어야만 됩니다.

복귀의 길은 인간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가고 계십니다. 인간은 지상을 통해서 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지상뿐만이 아니라 천상세계의 복귀의 노정까지 걸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위해 가는 사람들은 축복을 받고 나서는 지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사가 그래요.

내 개인이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의 불림을 받아 제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더 큰 십자가에 가담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한 발자국 발전해 가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개인보다 가정적인 기준을 세워야 하는 하나님은 가정적인 희생자를 세웠고, 가정보다는 민족, 민족보다도 국가, 국가보다 세계를 위한 희생자를 세워 왔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역사를 수습해 나오시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희생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를 중심삼은 하나의 기반을 닦기 위해서는 기독교로서의 희생적인 사명을 완결짓는 동시에 기독교를 이끌어야 할 하나님의 십자가를 대신 탕감해야 됩니다. 그래서 세기말적인 대환난이라는 명사가 나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