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집: 주관성 복귀 1971년 10월 0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2 Search Speeches

현재의 인간-게 있어 '"한 문제

불교에서 참선하는 사람들이 마음이 무엇이냐를 놓고 생각하는데, 마음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그런 경지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있다는 것은 상대 관념을 가져야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느끼지 못해요, 혼자서는. 상대적 관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의 존재 가치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 관념이 희박해지면 희박해질수록 자기의 존재 가치도 희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을 가진 부모가 보람을 느낄 때가 언제냐 하면 무엇보다도 부모와 자식간에 하나될 수 있는 내적 인연, 즉 상대적 관계가 공고화할 때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방으로 커지면 커질수록 더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입체적 형태를 갖추면 갖출수록 더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 보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여건이 희미해지게 될 때는 고독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의 현세는 어떠한 때냐? 모든 것을 망각해 버리는 시대권내로 들어가는 때입니다. 세계가 어디 있느냐, 나라가 어디 있느냐, 가정이 어디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 개체, 개인이 어디 있느냐 할 때, 미확실한 근거에서 존재하고 있는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확정지을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확정된 자리에서 확정을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체마저 부정해 버리는 이러한 시대권내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러냐?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출발점도 목적점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떠한 기원에 인연되어 연결된 것이 아니요, 어떠한 목적을 향해 갈 수 있는 길에 인연되어 연결된 것이 아니라 둥둥 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나라가 뭐야, 세계가 뭐야, 박애주의가 다 뭐야' 하며 전부 다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은 그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중심삼고 어떠한 힘을 작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 작용을 하면 할수록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손해보는 놀음은 안 하시는 것입니다. 천륜도 손해보는 놀음은 절대로 안 하는 것입니다.

어떤 동기를 갖고 과정을 거쳐 목적을 찾아 나가는 천운이 있다면, 그 천운은 반드시 그 동기와 목적을 접근시키고 단축시킬 수 있는 어떤 매개체를 통해야만 됩니다. 그런 매개의 자리를 확정짓는 사명을 해야 할 우리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 무엇을 확정짓지 못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천운은 그를 통해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희망을 걸더라도 희망의 한때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실존철학을 중심삼고 볼 때도, 인간은 현재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재의 세계에서 어떻게 인간의 가치를 추구해 낼 것이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아무리 가치를 찾겠다고 해도…. 그 가치적 기원이 누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데 대한 논거(論據)를 세워야 되는데, `그 가치의 기원이 누구냐? 사람이냐, 국가냐?' 이런 문제를 따지고 들어가게 될 때, 그 기원이 모호 합니다. 거기에는 확정적인 가치의 기준을 결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으로 귀결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금후의 이 세계는 어디로 갈 것이냐? 문제가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 소외를 부르짖고 있는 이때에, 누가 인간을 소외시켰느냐, 아니면 인간 자신이 그렇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그것도 확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외를 당했느냐, 나 스스로 소외되도록 만들었느냐 하는 그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해결 방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제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이제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본래의 중심의 자리에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스스로 본래 어떠한 중심 적인 자리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출발의 기원도 되지 못하고 목적의 결과도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정적인 내연을 통하여 연결시켜 주는 그 자리를 어떻게 자각하느냐 하는 문제가 인간에게 있어서 보다 큰 문제인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자체를 볼 때, `나'라는 자체는 결과적인 존재임에 틀림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디를 통한 결과인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나' 라는 결과를 가만히 따져 보면, 나라는 존재는 옛날 개인으로부터 종족을 거치고 국가를 거쳐 지금의 세계 끝까지 찾아 나온 것입니다. 수많은 전쟁을 거쳐서 오늘의 `나'를 남겨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나'라는 존재가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이상을 제기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만한 수난길과 얼마만한 투쟁길을 넘어야 될 것이냐? 그런데 그것을 넘기 위해 스스로의 결의를 다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는 절망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 세계인의 고민사(苦悶事)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이냐? 이 자리는 기원도 아니요, 결과도 아닌 중간 매개체의 자리입니다. 중간 매개체는 동기와 더불어 일치하고, 결과와 더불어 일치할 수 있는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자체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가치의 내용을 분석할 수 없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