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집: 신앙자의 자세 1971년 04월 2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18 Search Speeches

하나님이 함께할 수 있" 마음자세

여러분이 선악의 경계선에 서 가지고 우왕좌왕하는, 판가리 싸움을 하는 입장에서 한 걸음 잘못하면 사망의 세계로 떨어지고 한 걸음 잘하면 생명의 세계로 출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뜻 가운데'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자리로 가야 됩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까딱 잘못하여 한번 벗어나면….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어떤 때에는 12시간, 흑은 24시간 동안 기도해야 할 문제가 있었어요. 그때에는 생각으로 싸우는 겁니다. 어떤 사실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치열한 싸움을 하는 겁니다. 그런 싸움을 경험하는 자리에 있어서는 생각 일체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심각한 경지의 수난길이 있는 것을 알고 이것을 해결할 때까지는 자기에게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좋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외적인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외적인 것을 자꾸만 잊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비참한 거예요. 아무리 배고파도 배고픈 것도 잊어버리라는 거예요. 심각하면 그런 면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길에 있어서, 이런 싸움의 노정에서 선악을 가려 가지고 악을 밟아치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노정이 여러분의 깊은 신앙의 길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지금 여러분의 입장에서 해야 할 사명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문제를 알고 빚진 자를 대신해 침묵으로써 나 자체의 모습을 어떻게 풀며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동정해 주고 입증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거든, 동역자가 있거든, 혹은 어떤 스승이 있거든, 자기를 위해 수고해 준 그 뜻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몸 전체나 위신, 체면을 다 잊어버리고 그 앞에 완전히 종의 종이 되어도 좋고, 그 앞에 있어서 죽음을 당하여도 감사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완전히 감사하는 자리에서 그 은사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나는 악의 사슬을 벗어나는 데에 내 생명을 바치더라도 고맙다'고 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데서부터 본연의 신앙자로서의 자세를 갖추어 출발하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번 죽더라도 감사하고, 자기 존재가 없어지더라도 감사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런 각오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특별히 좋은 일이 있더라도 선생님은 절대 안 나타납니다. 그것은 왜 그러느냐? 복귀역사를 보면, 누구부터 속죄를 받았느냐? 만물부터 속죄 받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만물이 속죄를 받았지요? 그 다음에는 무엇이 속죄를 받느냐? 종들이 속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누가 속죄받느냐? 양자가 속죄받습니다. 그 다음은 아들이 속죄를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도 속죄를 못했기 때문에 속죄를 하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부모가 속죄받는 것입니다. 전체 순서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좋은 것은 나부터다' 하면 거꿀잡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는 아직까지 더 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에 누가 만나자고 해도 안 만나 주는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잘못하게 되면 대한민국이 걸려들어가게 되는 문제도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선생님은 못 믿어요. 또, 자기가 뭘 했다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못 믿겠어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 갈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빚진 자의 자세로서 침묵을 지키지 않고는 안 됩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부끄러운 수치를 누가 덜어 줄 것이냐? 그 수치에 대해 하나님께 동정을 바랄 수 있는 대변자가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대변자의 입장에 선 것이 변호사이기 때문에 그의 증거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치를 받았다면 참소하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원한에 사무쳤겠어요? 원한에 사무치게 한 녀석을 들추어내서 제거해야 됩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한날의 생활, 혹은 하나의 표정, 하나의 행동에 있어서 그것을 가릴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갖고 가는 사람들은 망하겠다고 해도 하나님이 부활 할 수 있는 축복의 터전을 만들어 주십니다. 죽겠다고 하는 길은 부활의 길이지 죽음의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죽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만약 그런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죽었다가는 큰일나는 겁니다. 죽을 자리에 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달려들어 가지고 살려 주는 겁니다. 망할 자리에 들어가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도중에서 가로막습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될 때에, '나' 하나를 중심삼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타락으로 인한 복귀의 한을 품으시고 뒤넘이친 것만도 원통하실 텐데도 불구하고, '나' 같은 사람에 대해 이렇게 죽음의 길을 가려 주시는 그 은혜를 생각하면 황공 망극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자신의 심정의 거점에 있는 그 사람과 그 은덕을 하늘땅 앞에 돌려드리고 가뿐한 걸음으로 가겠다고 해야 됩니다. 이런 마음이 여러분 신앙생활의 바탕이 되게 될 때,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의 길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까지 그런 생활을 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