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집: 가야 할 우리들 1959년 12월 2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04 Search Speeches

최후의 문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신의 심정을 아" 것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 주의나 사상에 지배받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원하느냐? 심정의 지배를 받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몸도 심정이 있는 곳에서 안식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어떠한 주의나 사상이 나왔다 할지라도 안식할 수 있는 심정적인 내용을 갖추지 못하는 한 불안과 공포는 더해 갈 것입니다. 우리의 심정을 움직일 수 있고 '영원히 영원히 내가 여기에 머물고 싶소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인류 앞에 나타나야 됩니다. 그래야 그것을 중심삼고 세계는 해결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어떠한 곳으로 오실 것이냐? 기필코 인류가 바라고 있는 심정의 터전 위에 나타나 가지고 인연맺고자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 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심정이 안식할 수 있는 동산,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본향의 동산입니다. 어떤 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는 행복하다'고 주장 한다 할지라도 그건 관념적인 행복일 뿐입니다. 환경에 따라 변하는 행복입니다. 그 무슨 제도가 생활하는 데 있어서 외적으로 좀 낫게 해준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그것에 굴복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어떠한 제도에 붙들려 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문제는 무엇이냐? 심정과 이념이 통할 수 있는 그 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최상의 분과 동등한 자리에서 온 만상을 바라보는 그 순간 비로소 우리의 마음과 심정에서 작용해오던 모든 요구조건이 정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을 통한 안식의 동산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아닙니다. 심정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안식의 동산이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겠다고 생각하고 사랑해요? 인식을 넘어서 이미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알기 이전, 인식보다 먼저 있는 것이 심정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마음의 안식을 얻은 자가 아니라 심정의 안식을 얻은 자입니다. 여기에서 죄악의 역사는 비로소 스톱합니다. 하나님도 여기에서 비로소 쉬실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심정 밑에 이념적인 초석을 놓고 있는 것이 하늘의 역사입니다. 그것이 바로 놓여지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은 요동할 것입니다.

끝날을 바라보고 있는 이 때, 우리 신앙자가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 딸이 되고 하나님의 심정을 가진 자가 되었다 할진대, 아무리 폭풍우가 불어오고 세계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그 심정의 보금자리를 농락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전세계 인류가 그런 자리에 있느냐?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도 가고 모든 것이 다 지나갑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이런 이념의 세계를 향하여 흘러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이념을 세워서 우리의 심정과 더불어 인연맺으려는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심정을 중심삼고 맺어진 부자지인연(父子之因緣)이 이 역사노정에 한번이라도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런 심정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인간이 대우주에 정착하여 더불어 살 수 있는 발판이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사탄의 제물이 되었고, 심정의 주인공을 맞지 못한 인류는 지금까지 비원리적인 심정 앞에 유린당하여 왔습니다. 이제 한분밖에 없는 하나님의 심정과 나의 심정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0여년의 생애노정을 거치면서 말씀과 주의를 우리에게 남기고 갔습니다. '이렇게 믿고 이러이러한 것을 지켜라 했지만' 영원히 안착(安着)할 수 있는 심정의 내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66권에 외적인 안식, 환경적인 안식의 터전은 이러이러하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지만 심정적인 기반은 이러이러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성경 66권 중에 하나님의 심정을 소개하는 귀절이 어디 있느뇨? 성경을 많이 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려면, 성경에 슬픈 귀절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에게 있는 제일 슬픈 것이 무엇이냐를 찾아야 됩니다. 성경 66권을 무불통지 (無不通知)했다 해도 뽐내지 마십시오. 통달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 66권 가운데서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귀절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 가운데 그런 귀절은 많지 않습니다. 단 한 두 귀절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사랑하는 두 남녀가 사랑하는 심정을 보여줄 때 수많은 말로 이러구 저러구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심정을 다 나타낼 수 있느냐?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연고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 맛을 못 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 본 사람 있어요? 이럴 것이다 하는 정도 밖에는 모르는 거예요. 예수의 사랑을 완전히 맛본 사람이 없고, 성신의 사랑을 완전히 맛 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붙잡으려 했지만 붙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격자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를 붙들고자 하는 자는 심정의 맛을 본 자, 세계를 대신하고 하늘 땅을 대신한 아버지의 마음을 통한 자라야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2천년 동안 예수를 믿고 성경을 붙들고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었습니까? 예수의 심정을 붙들었으며, 성신의 심정을 붙들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붙들 수 있고 예수의 모양은 볼 수 있고 대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품은 심정은 대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결판을 지어야 할 싸움이 있다 할진대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 이 세계의 싸움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싸움입니다. 우주적인 어떠한 감정이 나를 격동시키게 될 때 격동을 당하는 이 심정이 영원히 정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하나님 !'하면 '오냐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하여 떨어져 나간 인간을 외적으로 수습해 왔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는 종의 마음을, 신약시대는 아들의 마음을, 앞으로 재림시대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됩니다. 거꿀잡이로 찾아들어옵니다. 세계도 이것을 중심으로 세우고, 만물도 이것을 중심으로 세우고, 인류도 이것을 중심으로 세워 심판을 합니다.

왜 심판을 하느냐? 심정이 통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