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집: 정성의 예물 1967년 01월 2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31 Search Speeches

인간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정성과 인간이 세워야 할 조건

이런 인간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구원하시느냐? 적당히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주권자가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그 이상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어떤 단체에 있어서, 그 단체의 중심 인물을 하나님이 구원섭리의 담당자, 인간의 해방자로 빼올 수 있으려면 그는 그 단체에 충성하는 그 누구보다 정성어린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타락하여 사탄의 종의 종이 된 인간을 하늘의 종의 종으로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탄과 사탄국가 안에 정성들인 어떤 주권자나 백성들 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면 한 사람도 구원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당신은 이 인류 앞에 있어서 최고의 기준으로 서야 하며 나보다 더 높은 정성의 자리를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 이하의 자리에서 어떤 사람을 구원했다면 완전히 구원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참소할 것입니다.

사탄세계의 인간들을 그냥 두어 가지고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종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려면 사탄이 정성들이는 것 이상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세계의 주권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 사람이 충성하는 도수 이상의 자리에 서지 않고서는 사탄세계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를 통하여 인간들을 종의 종에서 종으로, 양자로, 아들의 자리를 거쳐 신랑신부, 부모의 자리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회복이나 복귀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섭리와 배후에는 정성어린 투쟁역사, 피어린 인내와 노력의 역사, 일편단심의 눈물의 역사가 얽어져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일편단심 정성을 다 들여서, 무한한 노력을 해서, 충심을 가지고 인간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구원섭리의 혜택을 받아야 할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하느냐? 인간도 역시 하나님을 대하려 할 때마다 사탄이 옆에서 참소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세우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섭리역사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120년 동안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 생애를 내어 놓고 그 길을 나섰던 노아의 결심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거기에 두 마음이 있었다면 10년도 못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애를 꿰뚫어 넘어갈 수 있고, 자기 생애가 좌우로 뒤넘이치더라도 변하지 않는 일편단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순응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명령을 허술히 여기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 또한 인내하고 투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기나긴 120년의 역로(迷路)를 참아 넘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정성 앞에 보답될 수 있는, 상대적인 조건이 성립 되었기 때문에 역사는 거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이 성립되지 않고서는 구원섭리역사를 세울 수 없고, 구원 섭리역사를 세우지 않고서는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할 수 없고, 섭리를 발전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섭리관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사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거친 후에 이러한 구원섭리의 이론이 이 지상 위에 남아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종의 종의 시대인 구약 전시대를 거쳐서, 종의 시대인 구약시대를 거치고, 양자의 시대인 신약시대를 거쳤습니다. 그런 다음에 직계의 아들로 오시는 분께 접붙임을 받아서 참다운 아들딸의 자리에 나가고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후에 아담 해와가 에덴에서 하나님의 혈통을 받아 태어났던 창조본연의 입장까지 나아가야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도 개인적으로 모실 것이 아니라, 가정의 전체 식구들이 하나 되어 모셔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런 에덴의 이상이 완성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직접 인간의 생활권에 동참하여 일체감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이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신랑 신부는 무엇을 말하느나? 아담 해와의 타락하기 전의 기준을 회복해 놓고, 즉 축복받을 수 있는 조건을 세워서 축복받는 것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복귀된 혈통적인 자녀의 인연을 세워서 본연의 이념권내에 세워질 수 있는 가정을 이루어 가지고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을 찾아 출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첫 출발을 해야 하는 것이 오시는 주님의 사명인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