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집: 주관성 복귀 1971년 10월 0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58 Search Speeches

본성의 주관권을 찾지 못한 입장-서 사'하면 무-하겠"가

그러면, 여러분이 그 세계의 모든 내용에 정서적인 문제를 결부시키는 것은 무엇이냐? 오관입니다. 오관. 눈, 귀, 코, 입, 그리고 촉각이예요. 이 오관을 통한 감정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을 보고 좋아하느냐? 실질적인 문제에 들어가서, 아내를 보고 좋아하느냐? 아내를 보고 좋아하기 전에 나라를 보고 좋아하고, 세계를 보고 좋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아내를 보고 좋아하는 것이 본성의 자리입니다. 안 그래요?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볼 때, 원래 아담은 찬란히 빛나는 자연의 질서 정연한 모습과 그것들이 화동 화합하는 상대적 이상세계를 바라보는 아담은 `이 이상적인 상대권의 세계는 우리를 찬양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구나. 아! 좋구만. 우리는 여기에 중심 핵이 되어 있구만' 해 가지고 그것을 품고 나서 아내를 사랑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아내를 보고 그 미모를 찬양하고, 아내의 음성을 듣고 화동하고, 아내와 더불어 생활환경에서 냄새를 맡고, 음식을 먹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성의 주관권입니다.

나라도 없이 세계도 없이 달랑달랑 다니면서 피난민으로서, 혹은 종의 새끼로 사랑하면 뭘해요? 그렇게 사랑해서 뭘하느냐구요. 그런 사랑은 시시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가 그런 것이 아니예요.

타락하지 않은 우리 인류의 본성적 부모의 기준을 중심삼고 보면, 우리가 하늘땅을 품고 나가게 되어 있는 거라구요. 하늘땅도 우리에게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좌로 가면 하늘땅도 좌로 가고, 우로 가면 우로 가고, 올라가면 올라가고, 내려가면 내려가고,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주관성을 중심삼고 천지의 대권한을 가지고 치우침이 없는 중심권의 자리, 모든 것을 지휘하고 모든 것을 가리는 자리, 모든 것을 주관하는 자리에서, 그런 터전 위에서 개인의 사랑의 인연이 맺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자랑을 하고 싶더라도 그러한 터전을 갖지 못했거든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랑은 부끄러운 자랑입니다. 자랑을 지나치게 했다가는 하늘의 갈 길이, 자랑의 길이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성을 들었다 하더라도, 본성의 터전을 갖춘 주관권을 세워 놓지 않고는 내 귀가 듣고 즐거워하는 것도 전부 다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적 기준이라는 것은, 이 귀가 사악한 세상의 소란한 소리를 듣고 그 선율에 따라, 그 음률에 취하여 움직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눈도 그렇습니다. 요사스러운 미녀를 보고 이 눈이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냄새를 맡는 코도 그렇다구요. 오늘날 그렇잖아요? 무슨 화장수니 향수니 하는 것들의 향기는 맡을 수 있지만, 순종의 거 뭐라고 할까, 순수한 향기를 드높이 맡을 수 있는 코가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도 타락권내의 사탄이가 똥칠한 것만 긁어다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사랑을 하면 뭣 해요? 뭐 피 난민이 되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사랑이 뭐예요?

그런 자리를 떠난 입장에서는 서로 격려해 가지고 나라를 찾자고 봉기 하는 데 있어 동지로서는, 투쟁의 격려자로서는 필요하지만, 사랑의 대상자로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차적인 종교인들은 독신생활을 강조해 나온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사랑을 하면 뭘하고, 아들딸을 낳으면 뭘하겠어요? 남편된 그대들이여, 아내를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을 사랑했고, 인류를 사랑했다는 증거를 가져라! 그런 증거를 가지고 아내를 사랑해야 그 사랑은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은 자리에서 사랑의 인연을 맺었다가는 그 여자가 방해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가야 할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여 인간의 타락권을 벗어나는 최고의 노정이 아니냐. 그러한 노정을 가야 할 운명이 남아진 과정에서 사랑을 하며 가는 길에 짐이 되고 방해꾼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그렇게 보는 거라구요.

통일교회 문선생도 그런 면에서 상당한 고충을 느껴 본 사람입니다. 차라리 여자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생각한 때도 있습니다. 이놈의 여자들 때문에 내가 욕을 많이 먹었다구요. 또, 차라리 남자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 하나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거예요. 여자가 없고 남자만 있는 나라였다면 내가 반대받지 않았을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여자만 있고 남자가 없는 나라였더라도 반대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중심삼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살기 때문에 세계를 사랑하고 하늘땅을 사랑하자는 사상을 갖고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아- 하늘땅은 나중이고 내 아들딸이 먼저인데…' 하는 바람에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단 사교로 몰려 비참한 운명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통일교회 문선생이 못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못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구요.

그러면 본성적 주관이 가능한 곳, 한 남성으로서 본성적 기준에서 아내를 사랑할 수 있는 자유의 천국, 평화의 천국이 어디냐? 한 아내로서 남편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와 평화가 깃든 천국이 어디냐? 마음의 천국이 외적 천국의 상대로서 그 하나의 아내를 들고 나오게 될 때, 아내 뒤에 세계와 천지가 달려 들어올 수 있는 자유의 천국기반은 어디냐? 이것이 지금까지 복귀도상에 남아 있는 과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족적인 교회는 가졌지만 나라가 없고 세계가 없기 때문에 이 길을 가려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만민이 그리워하는 나라를 어디에 세울 것이냐? 만국이 그리워하는 이상세계는 어디에서 이루어질 것이냐? 오늘날의 민주세계도 아니요, 공산세계도 아닙니다. 두 세계 다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세계와 민주세계를 밟고 올라서서 이 두 세계를 통합해서 다리 하나가 찌그러졌거들랑 다른 한다리에 힘을 주어 가지고 이렇게 지지하면서 하나의 세계로 가로놓아야 할 것이 하나님의 할 일이요,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충성하겠다는 사람들의 할 일이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