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집: 국가와 우리의 사명 1971년 10월 09일, 한국 중앙수련원 Page #140 Search Speeches

예수가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며 나선 이유

우리 통일교회는 무슨 일을 하자는 단체냐? 줘 가지고 후회하는 것이냐? 주어 가지고 고맙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게 될 때 이들을 갈라놓을래야 갈라놓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갈라놓게 되면 아들이 죽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생사의 문제를 중심삼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들만 데려갈 수 없는 것입니다. 좋게 하더라도 아들만 좋게 할 수 없다구요. 살리더라도 아들만 살려 줄 수 없는 것이요, 죽이는 데도 아들만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이 설정되어야 할 원칙적인 기대가 이스라엘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죽을 때 72문도도…. 그렇지요? 예수가 죽게 될 때 이스라엘을 대표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열두 제자도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죽은 후 열두 제자는 욕살박살 다 죽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남았습니다. 사랑을 대표한 요한만 남고 다 학살당한 거예요. 그렇지요? 그러면 왜 사랑의 대표인 요한만 남았느냐? 사랑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마저 없어지면 기독교는 남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믿음의 조상이요 야고보는 소망의 조상이요 요한은 사랑의 조상이지만, 그 중에 예수 앞에 사랑의 제자였던 요한만이 자기의 생애를 다 마치고 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거쳐왔어요.

이처럼 둘이 깨져 나갔기 때문에 다시 이것을 회복해야 됩니다. 예수 앞에 반기를 드는 유대교를 바라볼 때, 예수는 홀로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의 역사도 깨져 나갔고 양자의 역사도 깨져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종의 역사의 터전을 누가 닦느냐? 이것을 닦기 위해서 베드로 야고보 등 발판을 만들어 봤지만 그들이 제멋대로 놀아나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제멋대로 놀아난 터전 위에 하나님의 영원한 주초(柱礎)를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할수없이 예수 자신이 그 놀음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놀음을 하려고 했는데, 그것을 하라고 놔 두지 않고 죽여 버렸습니다. 죽여 버렸지만, 예수는 그런 사상을 가지고 죽어 간 것입니다. `내가 죽되 종의 전통을 대표한 자리에서, 양자의 전통을 대표한 자리에서, 또한 아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대표한 자리에서 죽어 가야 되겠다. 뿐만 아니라 부모를 대표한 자리에서, 하나의 주권자를 대표한 자리에서, 세계의 통치자를 대표한 자리에서 죽어 가야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전체를 대표한 자리에서 심정적인 일치점을 귀결시켜 가지고, 이 땅가운데서 죽지만 이 땅을 벗어난 입장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는 그 결정을 지어 놓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재출발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가 십자가에 나선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이것이 예수가 십자가에 나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전부다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종의 자리에서 양자의 자리를, 양자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거 알겠지요?

이렇게 수천년 동안, 기독교는 지금까지 예수의 사상을 중심삼고 싸우면서 따라 나온 것입니다. 예수의 사상은 무조건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희생하라. 희생을 하는데 조건적인 희생을 할 수 있어요? 무조건적인 희생의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종의 자리, 양자의 자리, 아들의 자리를 거쳐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조건을 세울 때는 양자의 자리로 갈 수 있는 조건을 세우려고 하지, 누가 종의 자리로 가는 조건을 세우려고 하나요? 또 아들의 자리로 나갈 수 있는 조건을 세우려고 하지, 누가 양자의 자리로 나가는 조건을 세우려고 하겠어요? 그러니까 무조건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내려가라는 것은 밑바닥, 종의 자리에서부터 터전을 닦아 세우라는 것입니다. 조건을 세우기 위한 복종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죽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볼 때, 이 답변이…. 예수가 한 말의 표준이 무엇이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베드로와 야고보 등, 제자들을 대해 수건을 동여매고 발을 씻기는 등 종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섬김을 받으러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했으니 그게 종 아니예요? 그 기반이 안 닦아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원칙은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을 위해 죽는다는 마음, 그 마음만 철저하게 개인적이요, 가정적이요, 종족적이요, 민족적이요, 세계적이요, 기독교권이 되면, 오시는 주님 앞에 예수가 올 때 반역하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민족은 안 될 것입니다. 현재에 남겨야 할 터전도 그런 자리면 안 될것이요, 미래에 있어서도 예수님을 쫓아낸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권과 같은 터전을 만들어 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사상이 일념화하고 일치화하고 세계화한 기독교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희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데는 하나님한테만 희생하면 돼요? 무조건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한테만 희생하는 거예요? 사탄한테도 희생하는 겁니다. 희생당하는 거예요. 그러한 사상의 모체가 기독교라구요. 만일 기독교 자체가 그러한 자세만 가졌으면 앞으로 오시는 주님 앞에는 핍박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자체가 망하고자 하면 기독교는 발전하는 것이요, 기독교 자체가 흥하고자 하면 기독교는 망하는 것입니다. 자주적인 입장에 선 기독교는 망하는 것이요, 순응적인 입장에 선 기독교는 흥하는 것입니다. 또 봉사적인 입장에 선 기독교는 흥하는 것이요, 대접받고자 하는 입장에 선 기독교는 망하는 것입니다. 틀림없어요. 이 원칙에 따라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