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집: 행복의 본향 1969년 05월 17일, 한국 청주교회 Page #295 Search Speeches

비참했던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

그래서 애기를 배 가지고 애기가 5개월, 6개월 커 나오니 배가 불룩하게 나온다는 겁니다. 이러니 요셉이 기분이 좋겠나요, 나쁘겠나요? 「나쁩니다」 '근원 모를 사생아! 잘도 크는 구나' 했다는 거예요. 그래 마리아가 배를 내밀고 다니는 게 기분 좋았겠어요, 나빴겠어요? 하나님의 뜻은 멀고 실제 자기에게 직접적인 일이니 기분 나빴다 이거예요. 트러블이 많았다는 거예요.

그러나 여자는 그 전부를…. 날을 잘 계산할 줄 알기 때문에 어느 달 어느 때에 낳을 것이다 하는 걸 잘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세례 요한네 집에 가서 석 달 동안 살고 왔기 때문에 그런 걸 잘 가르침 받게 돼 있었거든요. 언제 애기를 낳을 줄 다 아는 애기 어머니가 막달이 닥쳐 가지고 오늘이야 내일이야 하는데 예루살렘 수백 리 길을 올라가는 데 있어서 어쩌자고…. 요즘에 거 뭔가요? 무슨 저고리? 「배넷저고리요」 배안에 저고리인지 배 밖에 저고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애기 입는 옷 한 벌도 못 마련하고, 애기 누일 수 있는 깔개 하나 못 마련해 가지고…. 그게 무슨 짐이 되겠나 말이예요. 보따리 하나 차면 그냥 따라가는 건데요. 왜 그런 준비를 하나 못 했느냐 이거예요. 이런 준비를 했다면 요셉에게 있어서는 폭발적인 동기가 된다는 겁니다. 가는 길에 싸움이 벌어질 거라는 거예요.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요셉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고 준비할 수 없는 입장에서 끌려갔던 마리아였다는 겁니다.

그래 도중에 마리아는 '하나님이여 부디부디 나그네 도상에서 애기를 낳지 않게 해주소서' 하며 천번 만번 기도를 드렸지만, 날이 찼으니 나을 애기는 나와야 되겠기 때문에, 하나님도 원리원칙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말구유에서…. 그래 할 수 없이 애기를 말구유에 뉜 거예요.

4천 년 동안 하늘의 왕자를 보내겠다고 오랜 역사과정을 통해 선지자를 보내 예언해 가지고 보낸 아들이니, 이스라엘 민족의 환영 가운데 어떤 보좌에 누워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터인데 몰림과 쫓김의 자리에서 누일 곳이 없어 말구유에 누였다는 겁니다. 마리아가 누일 곳이 없어 말구유에 누여 하룻밤 신세를 지는 가운데 거기에서 애기를 낳아 가지고 말구유에 뉘인 것이 예수교에 있어서 자랑이예요? 기독교의 자랑이예요? 그리고 하는 수작들이 '하나님의 외아들이 만민의 죄를 사하고 구하기 위해서 천한 자리에 태어났으니 감사합니다' 이러고 있다는 겁니다. 감사는 무슨 감사예요. 기가 막히다구요.

또, 교법사니 서기관들이 하는 수작이 가관이예요. 헤롯에게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이 났다고 하면서 찾으니까, 헤롯이 유대교 교법사들을 불러다가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난다고 했노?' 하니까 '베들레헴에 난다고 했소' 라고 했다구요. 그래 가지고 예루살렘이 예수탄생과 더불어 소동했지만, 소동한 그때에 메시아를 그렇게 고대한 이스라엘 민족 중에 어느 누가 옷 한 벌 준비하고 방 하냐를 준비해 놓고 예수를 그리워하던 사람이 있었느냐?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예요. 예수가 오면 전부 다 예수 등쳐먹고, 전부 다 복받고 천국 가겠다고? 뭐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겠다고? 백정놈보다 더 나쁜 도적놈 심보를 가졌다는 겁니다. 될 게 뭐예요? 될 법이 뭐예요? 안 되는 거예요.

자, 이래 가지고 예수가 태어났는데 헤롯왕이 잡아죽이려고 했어요. 그래 하나님이 가만히 보니까 동네에 가야 누가 달가이 맞아 주겠느냐 이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 몸을 숨겨 줄 자 누구뇨? 동네방네 친척이나마 손가락질하고 '아이고, 애기 났다' 하고 소동이 더 나겠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애팜으로 피난을 보낸 거예요. 피난가 가지고 3년 있다가 갈릴리 해변가에 돌아와 가지고 남이 모르는 가운데 부처끼리 예수를 기른 거예요.

의붓자식으로 태어난 예수는 요셉의 눈치를 보면서 자라야 했다구요. 철을 알게 될 때에, 요셉과 마리아가 자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사연을 알게 되는 거예요. 예수가 자기 어머니의 품에 안기려고 하면 마리아는 뒷걸음치면서 요셉을 곁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될 이런 환경에서 살았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열두 살 때까지 자라다가 예수살렘 성전에 예수도 따라 올라갔던 사실이 성경에 나오지요? 어머니 아버지가 예수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갔다가 예수를 버려 두고 사홀길을 갔다가 예수를 떡 데리러 왔다 이거예요. 그때 예수한테 뭐라고 그랬느냐? '야야, 예수야, 너 왜 여기에 있느냐?' 라고 했어요. 그때 예수의 말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대답했다구요.

그것을 오늘날에는, 예수가 지혜가 많아서 성경학자들하고 성경 토론을 하느라고 그랬다고 수작은 잘 갖다 붙이지요. 천만에요. 에미 애비가 나이 어린 예수를 떼어 놓고 사홀길을 갔다가 오는 원인이 어디 있어요? 떠나는 그 시간부터 그걸 알고 가지 않았느냐 이겁니다. 버리고 사흘길을 갔다가 돌아오는 에미 애비가 어디 있어요? 이 쌍것들! 소년의 가슴에 사무친 남 모르는 비운이 폭발하는 선고의 말이라는 걸 우리는 알아야 돼요. 그거 이해해요?

그러면 어떻게 돼서 사흘길을 가다가 돌아왔느냐? 마리아는 그 즉시 알았다는 겁니다. 요셉도 알았다는 겁니다. 알았지만 심술궂은 아버지 요셉에게는 예수가 보기 싫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요셉이가 끙끙 하고 가는데 마리아가 예수가 없다고 하면 큰 벼락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도상에서 챙피한 일이 벌어지겠으니 할 수 없이 영감의 뒤를 따라가기는 했지만, 자기도 양심이 있기 때문에 어린 예수를 버리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어느 한 때 예수에 대해 말할 기회를 사흘 동안 기다리지 않은 시간이 없을 만큼 고대했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사흘이 돼 가지고야 '아이구, 예수를 안 데리고 왔구나' 했을 거예요. 그랬겠어요, 안 그랬겠어요?

어미 애비가 사흘이나 어린애를 그냥 내버리고 가는 법이 어디 있어요? 성경에는 그렇게 안 되어 있지요. 그렇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은 아는 거예요. 내 말이 맞다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다 빼 버린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