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집: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1959년 11월 0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54 Search Speeches

목적관이 확실했던 예수의 삶

예수님은 원인과 동기와 목적관이 확실한 분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랐다는 거예요. 예수는 오직 하나님을 붙들고, 하늘도 붙들고, 땅을 붙들고 뒤넘이치다 가셨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가지는 것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가지는 것은 전부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원인과 동기의 세계를 소유하였고 목적의 세계를 소유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권한을 가지고 움직이던 사람들에 의해 그는 억울하게 죽었으나 그의 세계관은 인류역사와 더불어 남아질 것입니다. 그의 이념은 오늘날까지 인류역사를 이끌어 나오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요셉의 가정에서 심한 상처를 받고 자랐습니다마는 그것은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정이 어디 있었어요. 예수님은 가정이 최후의 목적지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 사회 역시 최후의 목적지가 아닌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 예수였습니다.

그러기에 유대교단을 향하여 예수님이 나서게 될 때 '야, 이 녀석아, 가지 말라'고 하는 유대교인들을 대하여 '아니다. 너희들이 반대해도 나는 가야 되겠다' 하셨고,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민족이 동원하여 민족의 반역자로 몰아내며 가지말라 하여도 '아니다. 나는 가야 되겠다' 하셨던 예수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 살았습니까? 생명을 걸고 가지 말라 하여도 '땅에 있는 생명들을 위하여 나는 가겠다' 하시며 죽으신 목적이 어디 있느뇨? 동기와 목적을 세워야 했기에 예수께서는 과정적인 세계의 모든 것을 박차고 늠름히 넘어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주입니다. 그는 땅 위의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늘의 이념과 함께 했고 밥을 먹어도 이념과 더불어 먹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아버지! 하늘이 즐거워하실 수 있는 행복의 이념세계가 이루어질 날이 언제이겠습니까?'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이 있을지라도 '아버지! 역사적인 이념을 인간 앞에 부여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저희를 아버지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 주시니 황공하옵니다. 천주의 대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홀로 책임지시고 애쓰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마음으로라도 느낄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하신 예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동기와 목적을 잃어버린채 허덕이는 인간들이 아니라 동기와 목적을 소유한 사람이 나오기를 하늘은 얼마나 기다리시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모르는 인간에게 동기와 목적을 가르쳐 주셔야 할 책임이 있는 연고로, 하늘은 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의 고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늘은 어찌하여 사망의 환경에서 사탄의 제물이 되어 나가는 인류를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시는고. 하늘의 그 애달픈 심정을 아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치열한 마음의 투쟁을 한 사람이며, 외적으로도 역사이래 최대의 투쟁을 한 사람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약자같이 쓰러지셨으나 그 마음의 세계는 역사가 시작된 이후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심정세계에 가까왔고, 자기를 반대하던 세계, 즉, 원수 사탄을 대하여 누구보다도 치열한 투쟁을 하다가 쓰러지셨기 때문에 그것을 조건으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살라고.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동기와 목적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도 그 동기와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가셨을망정 그의 이념과 목적은 남아진 것입니다. 인간이 천륜 앞에 생명을 갖고 태어난 이상 필시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슬픔을 당하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 나라와 그 의를 높이기 위하여 산 사람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