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집: 하늘은 심정으로 모시는 자의 것 1960년 02월 14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98 Search Speeches

하늘이 찾고자 하시" 것과 신부의 길

그러면 오시는 주를 모시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6천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무슨 길을 닦아야 되는가. 아무리 억천만금을 쌓아 놓아도 하늘은 그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호화찬란한 문화를 이루어 놓았다 할지라도 하늘은 그것을 그대로 취하실 수 없습니다. 인간 들이 어떤 금력을 갖추어서 '그것이 하늘 것이다' 해도 하늘은 그것을 취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무엇부터 갖고자 하시는가. 하늘은 어떠한 물건부터 가지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늘이 갖고자 하시는 것은 심정입니다. 심정이 주도적인 권한이요, 심판의 기준이요,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하늘은 무엇을 찾기 위하여 찾아 헤매시고 허덕여 나오시는가. 돈을 찾기 위하여? 사람을 찾기 위하여? 천만의 말씀입니다. 준비된 심정의 소유자를 찾기 위하여, 심정을 통하여 모시기 위한 준비를 하는 자를 찾기 위하여 하늘은 6천년 동안 허덕여 나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부가 뭐예요? 신부는 신랑을 위하여, 신랑이 생각하는 일체를 구비한 하나의 완전한 대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신부는 실체로서의 몸과 마음이 있어야 되고 거기에 대응하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신부는 자기에게 속한 것도 자기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 것이로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러한 노정에 있는 기독교의 사상은 신랑 신부의 사상을 말해 줍니다. 신랑을 모시기 위해 준비하는 처녀와 같이, 있는 정성을 다하고 또 그 몸에 사무친 정열이 피와 더불어 끓어오를 때에 비로소 그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첫번째요 마지막 것으로서 품어질 수 있는 자리를 찾아나아가는 것이 신부가 가는 길입니다.

그 심정 앞에는 신부의 모든 것이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심정을 내놓고 나아가는 데는 자기의 소유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가 존중히 여기고 자기가 귀하게 여기는 만큼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한 때, 한 시간이라도 그 분을 모시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전세계 기독교인은 각성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모시기 위한 준비과정에 있는 신부들로서 유대교인들은 무엇을 준비했던고. 만일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이러한 심정을 알아 준비한 자가 있었다면, 예수를 말구유에 누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알고 보니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구세주가 30평생의 목수 생활이 웬말입니까? 하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던 동방박사는 어디 가고, 세례 요한 가정은 어디 갔으며, 안나는 어디 가고, 마리아와 요셉은 어디 갔기에, 하늘의 아들 예수가 거지 중의 왕거지가 되었단 말입니까? 그한분을 위하여, 그 한분의 안식처를 위하여, 그 한분의 평화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자리에 나가는 한이 있다 해도 그것을 책임지도록 그들을 택해 세워놓고 아들을 보내셨으나 어느누구도 그러한 하늘의 뜻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증거는 해 놓고 다 자기 멋대로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하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만일에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모셨더라면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귀한 몸이니 당신의 생활적인 것 일체를 내가 책임지겠나이다. 땅 위의 슬픈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나이다. 돈이 없어 염려되면 그것을 내가 책임지겠고 입을 것이 없어 염려되면 그것도 내가 책임지겠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겠나이다'라고 한 사람이 있었어요? 없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예수를 의심했고 예수의 동생들도 비웃었습니다. 형님을 보고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라고 하며 동생들까지 비웃었던 것입니다(요 7:3--5). 이게 웬말입니까?

여기에 모인 여러분, 우리는 예수시대를 생각하며 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니 예수를 땅에 보내기 전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수고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울어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타락하는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면서도 그 고통을 참으시던 하나님, 타락하는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고 안타까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며 울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시느라 수고하시던 시대로부터 아담 해와가 타락한 이후 4천년 동안 슬픈 고비고비, 예수님의 30여 평생의 슬픈 고비고비, 예수님 이후 성신이 강림하여 가야 했던 2천년 간의 슬픈 고비고비를 대신하여 눈물지으면서 '선조들의 불충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선조들의 부족함을 용납하여 주시옵고, 선조들의 죄악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모습, '우리 선조들은 오신 분을 그렇게 대접하였지만 저는 절대 그렇게 대접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며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입을 것을 입지 않으면서 자기 일신의 어떠한 손해와 피해를 개의치 않고 허덕이는 하나의 모습, 하나의 무리가 땅 위에 나타나기를 나는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이 붙들고 통곡하실 것입니다. 예수도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성신도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삼위신(三位神)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 왔다 갔던 역대의 선지선열들도 그를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 위에 눈물로 증거받을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이 눈물로써 증거할 수 있는 하늘의 심정을 대신한 모습을 갖춘 자가 있는가 하나님이, 예수가, 혹은 성신이 심정의 준비를 갖춘 자라고 눈물로써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역사적인 선조들이 '우리들도 하지 못한 일을 그대들이 해 주었다'하며 눈물지을 만큼 준비한 사람이 있는가. 없다 할진대 망해야 됩니다. 망해야 돼요. 기필코 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어떠한 문화가 아닙니다. 어떠한 사상도 아닙니다. 사상을 움직이시는 하늘과 더불어 움직일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 서지 않는 한, 역사는 방향을 갖추어 나갈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최후에 인류 앞에 남아질 것은 어떠한 문명도 아니요, 어떤 형식적인 종교단체도 아니요, 자기의 주관적인 어떤 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심정을 통할 수 있는 것만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심정이란 만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론에 앞서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격의 주인공이 이 땅 위에 나와야 이 땅은 수습될 것입니다. 그런 사명자로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