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집: 가야 할 예수의 노정 1971년 10월 3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49 Search Speeches

비참했던 예수의 공생애노정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알기를 거룩한 노정…. 그래 가지고 천국 가겠다고? 예수의 공생애노정이 거룩한 노정이 아니라 비참한 노정이라구요. 4천년 이스라엘의 역사가 뒤집히는 순간이요, 유대교의 역사가 깨져 나가는 순간이요, 요셉 가정의 축복의 터전이 폭파되는 자리라구요. 제자들과의 인연이 전부 다 갈래갈래 찢겨져 소망이 없는 순간이라구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과 더불어 결속시켜 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예수였기 때문에, 인간을 붙들고 이것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 죽고 난 후에도 원한의 터전으로 남았기 때문에, 배반했던 제자들을 찾아가 사정을 토로하자 않을 수 없었던 예수였다는 것을 그 누가 알았겠느냐 이거예요. 기가 막히는 장면이었다는 거예요. 그걸 보게 될 때, 예수는 이 땅 위에 와서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배반했던 무리들인 열두 제자를 중심삼아 가지고 수습했던 것입니다.

사랑의 인연을 찾아왔던 예수를 죽음길로 몰아냈기 때문에 그런 무리는 벌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을 남기기 위해서 가던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어받기 위해서 찾아가는 무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생겨난 것이 구원의 도리가 아니예요. 기독교의 수난의 도리예요. 그걸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뭐, 십자가로 구원을 받겠다구요?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수난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못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갔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가지 않고는 사랑할 수 있었던 자리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말을 하기 이전의 베드로의 자리에 찾아갈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자리는 예수님이 죽기 전이 아니라 죽고 난 후의 일이기 때문에, 죽고 난 후에 사랑의 약속이라도 받겠다고 찾아 나온 것이 지금까지 2천년 기독교 역사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예수는 신랑이요 자신들을 신부라고 믿고 나왔습니다. 사지사판에서 순교의 시련 역사를 거쳐온 선지선열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죽기 전에 예수를 만나 가지고 '내 사랑하는 신랑이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에게 퍼부어 주시옵소서' 할 수 없다는 거라구요. 살아서 못 한 사랑을 죽어서 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비참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적으로 한번 만나려면 7년 이상의 수난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7년 이상,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영적으로 예수를 만나 봐요? 어림도 없다는 거라구요. 죽을 힘을 다하고 나서 부활의 권한을 찾아 가지고 거기에 동참자가 돼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사랑의 인연을 거칠 수 있는 자리를 거쳐 가지고 오른편 강도 이상의 자리에 서지 않고는, 오른편 강도와 더불어 넘어가서 사랑을 잃어버렸던 예수를 잃어버리기 전 자리로 끌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어가서 베드로와 같은 자리에 서야만 사랑의 약속을 받고 돌아올 수 있는 것이지 그전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