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집: 완전복귀 1966년 12월 1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66 Search Speeches

불신당하신 예수님의 심정과 그 한

요즘 믿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게 되면 '하나님, 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희 가정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민족과 세계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데 그러한 기도는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왔다 갔던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이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습니까?

수천년 동안 계속 그렇게 기도를 했을 텐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루어 주시지 못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계를 용서하시려면 하나님이 세계를 대하실 수 있는 터전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을 용서하시려면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 앞에 초청될 수 있는 자리에 서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하려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느냐?

예수님은 사탄의 3대 시험에서 승리했지만 사탄의 침범권내에서 침범을 받고 영적으로만 부활되어 그 권한으로 아버지 앞에 가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 한계는 사탄세계의 범위, 즉 사망권으로부터 영적으로만 부활할 수 있는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들을 완전복귀시켰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명도 그 분야밖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밖의 것은 예수님이 다시 와서 이루어야 합니다.

자기 개인적으로 승리하지 못하고서는 가정의 무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없고, 가정적인 승리를 결정짓지 못하고서는 종족의 무대를 향하여 나아갈 수 없으며, 종족적인 승리를 결정짓지 못하고서는 민족의 무대에 나아갈 수 없으며, 민족적인 승리를 결정짓지 못하고서는 국가의 무대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또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을 갖추지 않으면 세계의 무대에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단계를 거쳐가야 할 절대적인 천명을 받은 예수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길을 가지 못하고 맡은 바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예수님의 심정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예수님은 갈래야 갈 곳이 없었습니다. 몰리고 쫓기면서도 하늘의 뜻을 마음에 품고 복귀섭리를 이루어야 할 책임을 지고 가야 했던 예수님, 그러한 사명을 짊어지고 가는 길에도 몸 둘 곳이 없어서 갈릴리 해변가 혹은 겟세마네 동산의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며 사정하시던 그 심정이 얼마나 적적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믿으면 구원 받는다' 하는 엉터리들이라면 반성해야 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를 믿고 신부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신랑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도 모르고, 또 오신다면 말을 타고 오시는지, 구름을 타고 오시는지, 땅 속으로부터 오시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우리 신랑은 구름 타고 오신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신랑이 오면 내가 무엇을 대접할 것인가도 생각하고, 또 신부로서 그를 맞이할 수 있는 승리의 개인이 되어 공동목적을 위해 그와 같이 갈 수 있는 준비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러한 준비도 안 해 놓고 그저 나 좋기만을 바라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쉴 새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은 참다운 개인을 대할래야 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이스라엘 나라를 지배하고, 로마제국을 지배하고, 세계를 맨손으로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비난과 비소에 자기 몸을 움츠려야 했고, 로마의 창칼에 쓰러져야 했습니다. 나라로부터 몰렸고, 교회로부터 몰렸고, 자기의 가족에게서까지도 환영받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제자들에게서까지도 불신을 당했으니, 갈 곳이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딱하고 원통한 사정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씻어 주기 위해서 죽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믿어서 그것이 통한다면 좋겠지만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통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비난받고 손가락질 받을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