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집: 생사의 한계 1970년 07월 28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32 Search Speeches

생사의 한계점이 결정되지 못한 현시점

오늘 이런 날을 맞이하여, 나는 옛날에 하나님 앞에 맹세했던 것을 다시한 번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노정에 있어서 그 누구도 모르는 이런 사명을 책임 지을 수 있는 아들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아들이 누가 되겠느냐? 통일교회 문 아무개라는 사람이 그 책임을 짊어지기 위해서 나왔느냐? 나는 사실 그러려고 나왔다 이겁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럴 수 있는 한날을 고대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길을 가는 도상에서 우리 협회가 해야 할 책임은 하나님 앞에 짊어져 있는 슬픔을 만족을 대신하고 세계를 대신하여 짊어지는 것입니다. 아들의 그런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나가는 길에는 상대적인 환경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개인으로서 책임질 수 있는 완전한 한계점을 결할 수 있는 것이요, 사망권 앞에 생명의 기준을 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는 한계점이 아직까지 결정되어 있지 못한 것을 볼 때, 여기에는 상대적 환경에 그런 탕감의 제물적인 조건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내가 뜻을 받들고 나가는 데 있어서 가정이나 단체, 또는 아들이 그와 같은 자리에 나가는 것을 볼 때, 나는 슬퍼할 수 없습니다. 슬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찾아 세우려는 것은 슬픔의 역사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쁨의 역사를 남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당할 적마다 가일층 이 비정한 환경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울부짖고, 내일의 역사에 슬픈 내용 모두를 전부 책임지겠다고 결의하고 다짐해야 되는 것입니다.

협회장이 갈 곳을 놓고 이미 오래 전에 아버지 앞에 내가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손을 잡고 눈물의 기도를 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요, 죽기를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의 뜻이 죽어서는 안 될 것이요, 아버지의 사명이 죽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더라도 아버지의 뜻은 살아야 되겠고, 우리가 희생되더라도 아버지의 뜻은 남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에, 아들이 천만번 죽더라도 뜻을 살리는 길이 있다면 그 죽음길을 기쁨으로 보내야 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겠다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나 자신을 스스로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올 때가 왔구나!' 하며 하나님은 정말 슬픈 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아들이 60년대에 불구의 몸으로도 뜻을 중심삼고 정성을 다 들이겠다고 몸부림친 내적 고충, 외적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내가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인상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필생에 내가 저 아들을 대신하여 어떠한 희생의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불구의 그 신세는 면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가 하루라도 건전한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으로서, 하나님을 모시고 하루만이라도 기쁜 얼굴로 웃는 모습을 보면 한이 없겠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수술을 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또 뜻이 찾아 나온 모든 역로를 헤아려 볼 때, 그가 피를 흘려야할 때인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한 수난의 행로를 책임지고 선생님의 명령에 의하여 입원하였다가 선생님의 뜻을 중심삼고 갔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오늘날 우리 협회가 가야 할 수난의 노정에 있어서 전체는 안 되더라도 한 부분의 슬픔을 대신하여 책임지고 가는 아들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선생님의 소원입니다.

그가 낫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 없는 나 자신인 것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맡기고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왜? 광활한 이 세계를 맡기 위해 세계의 슬픔을 남겨서는 안 될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