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집: 하늘이 찾아온 길 1970년 07월 12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70 Search Speeches

주종관계밖- 맺지 못한 예수님과 제자"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냐 할 때, 형님의 책임을 짊어지고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예수님과 인간들은 형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형님이요, 그 다음에는 예수님은 인간들의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인간들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내용을 갖추고 온 주체적인 존재가 역사상의 수많은 도인들 가운데 예수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길을 갔느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가 간 길이 어떤 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간 길이 형제의 인연을 맺고 간 길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를 중심삼고 볼 때, 그들은 예수님과 형제의 인연을 맺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인연이 깊어지면 신랑 신부의 인연을 맺어야 했으며, 신랑 신부의 인연이 깊어지면 부자의 인연을 맺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형제의 인연조차도 맺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한 부모의 핏줄을 이어받은 형제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기 형님과 같은 예수, 자기 동생과 같은 예수가 죽어가는 자리에 처했을 때 그냥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피가 끓어 올라 사랑하는 동생과 같은 예수를 대신해서 자신이 죽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찾아갔을 것이 아니겠어요? 세상에서도 동생을 위해 형이 죽고, 형을 위해서 동생이 죽는 일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중심삼고야 그 이상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므로 그들은 형제의 인연도 맺지 못한 주종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스승과 제자의 입장으로 그런 관계로는 친척관계도 맺을 수 없었다는것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어서는 주인이 죽게 되면 종은 떠납니다. 주인이 망하게 되면, 보따리 싸가지고 그 집을 떠나 버리는 것이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의 관계라면 형님이 망할 입장이 되었을 때, 동생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투입하여 온갖 정성을 다해 형님이 망하는 것을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형제의 도리인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과 베드로는 주종관계, 즉 주인과 종의 자리에밖에 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맺어지는 것이 형제의 도리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이상의 자리에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예수를 형님 이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어떤 자리에서 예수를 배척했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5)"하고 사랑 문제를 강조했던 것이 어떤 내용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 내용은 네가 동생 중의 동생이 되고 형님 중의 형님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내용이요, 혹은 남편과 아내의 심정 이상의 자리에 나갈 수 있느냐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아들이고 나는 아버지의 입장에까지 나갈 수 있느냐 하는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몬에게 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한 말은, 베드로의 사랑을 분석한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길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가 찾는 동생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색하는 사람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상의 자리까지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을 모시기에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했느냐 하는 것을 알고서 그것을 첩경으로 삼아 그들보다 더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은 것은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배반하였던 불신의 입장을 넘어서려는 하나의 방편으로서의 죽음이었지, 예수님 앞에서의 내일을 약속하고 다짐하는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즉 탕감하는 죽음은 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복을 직접 연결해 줄 수 있는 죽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가 갔던 그길을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넘어야만 그들보다도 예수를 더 사랑하는 입장에까지 접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상의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이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세워 그들에게 다리 놓은 역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당신의 사도들 이상의 사람들이 안 나왔다 할 때는 그 사도들을 세워서 다리 놓는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월권해서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장이 있고 그 밑에 과정이 있고 계장이 있고 반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장이 직접 반장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질서를 혼란시키는 것입니다. 한 부분에 있어서는 잘될는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망치게 되는 겁니다. 자기의 위치를 지켜서 그 주의에 관계되어 있는 계열을 통해서 순리적으로 움직여야 되는 것입니다. 영계의 조직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