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집: 통일기반 확보를 위하여 1971년 01월 0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57 Search Speeches

뜻으로 본 해방 직후의 시대

예수님은 종족적 메시아의 기반을 닦아 가지고 일시에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에 연결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못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적인 기반만을 이루어 놓았던 것입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이 이남에 와 있던 때인 해방 직후는 예수님이 완성권을 넘어서고자 했던 때와 같은 시대였습니다. 그때의 기성교회는 예수님 당신의 유대교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는 나라도 없었습니다. 교회가 나라를 대신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때 당시는 내적으로 이기붕 씨가 이승만 박사를 업고 정치적 역할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나도 거기에 중요한 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알았지만 작은 할아버지가 이박사하고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 줄 그땐 몰랐습니다. 평안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문 아무개'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우리 작은 할아버지이셨습니다. 이박사라든가 독립운동을 하던 지도자들과 함께 역사적 시련을 지고 나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알아보니까 우리 작은 할아버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셨더라구요.

내가 여덟살 땐가에 6.10만세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작은 할아버지는 일본 경찰로부터 갑종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고 피신해 다녔습니다. 강원도, 경상도 등의 산악지대로 피신해 다녔습니다. 항상 피신해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디 가서 오래 못 살았던 것입니다. 보따리 싸가지고 해방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전국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셨습니다. 작은 할아버지는 일본이 우리 나라를 지배할 때부터 반기를 들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외지(外地)를 떠돌아다니며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집이 큰집이었는데 증조할아버지 때에는 참 잘살았다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많은 재산을 축복받았기 때문에 그 인근 지역에서는 이름난 집안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재산이 할아버지한테 상속되었는데 할아버지 동생 되시는 목사였던 작은 할아버지께서 그 재산을 저당 잡혀 가지고 어디에 써 버리는 바람에 전부다 파산돼 버렸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집은 일시에 파탄되어 버린 꼴이 됐습니다. 그런 일로 말미암아 우리 집안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작은 할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 앞에 면목이 없고, 조카들 앞에도 면목이 없게 되어 어느날 온데간데없이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 뒤에 어떤 소문이 났느냐 하면 남의 광산까지 팔아먹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때 교인들 가운데 광산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 교인의 광산까지 팔아먹고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거예요. 그렇게 남의 광산까지 팔아먹고 도망갔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목사가 패가망신해 가지고 고향에 도저히 있을 수 없으니까 도망가 버렸다고 소문이 난 거예요.

그러니 할아버지도 그렇게 알고 계셨고, 조카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문중 전체, 동네 전체, 인근 동네에서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모두 그런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목사 노릇을 한다고 하면서 교인들 못살게 하고 식구들 못살게 해놓고 어디로 도망을 갔으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작은 할아버지에 대해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던 겁니다. 그럴 거 아니예요? 집안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면 전부다 작은 할아버지를 원망하던 처지였으니까.

그런데 작은 할아버지가 가져간 돈이 어디로 갔느냐 하면 상해임시정부로 갔던 것입니다. 그때 돈으로 7만원이면 상당히 큰 돈이었는데 그 돈을 전부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고 다니시다 결국 외지(外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 일을 했기에 하늘이 사랑할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기의 전체를 희생시키고, 교인들을 희생시키고, 문중을 희생시키는 입장에 서 가지고 나라를 위해서 일생을 방랑객으로 지냈던것입니다.

선생님이 남한에 내려왔을 때 친척이라곤 그분밖에 없었습니다. 꿈에 그분이 혈족(文龍基장로)에게 나타나 가지고 어떻게 돌아가시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고 주소를 알려 주어서 그 주소를 가지고 사촌동생 용기가 그곳을 찾아갔었습니다. 찾아갔더니, 그때는 이미 작은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모든 것이 현몽한 그대로 틀림없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 할아버지를 해방 직후 이북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만났는데 그 할아버지가 워낙 바빠서 얘기도 제대로 다 못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때 그 내용을 전부다 얘기했었다면 뜻은 급속도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뜻이 그렇게 출발하게끔 되어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에게 이박사가 헬립콥터를 세 번씩이나 보내 가지고 데리고 가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남한에서 소리없이 죽은 듯이 조용히 살려는 생각에서였던지 나타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만약 그 할아버지가 뜻을 알아서 앞장섰더라면 우리 길은 활짝 트였을 것입니다.

이렇듯 안팎으로 인연을 맺을 수 있게끔 하나님이 준비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잘못해 가지고 인연을 맺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기반이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작은 할아버지는 한학자(漢學者)로서도 이름이 나 있었고, 목사이기도 했으니까 그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서기만 했었다면, 틀림없이 한자리했을 것입니다. 그랬을 게 아니예요? 그런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기회를 놓쳐 버렸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결국은 이 나라와 선생님과 통일교회가 수난의 길을 거쳐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해방 직후는 나라도 없는 때였습니다. 그러니 나라를 세워야 했습니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때가 가까와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때가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선생님과 인연을 맺고 앞에 나서서 일하던 사람이 기성교회의 유명한 목사였는데 그는 자기가 앞으로 권력을 쥐겠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선생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문제가 벌어지고 우리 통일교회가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