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집: 신앙의 심도 1971년 05월 3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31 Search Speeches

한 개인의 심정적 심도가 새 -사를 창조할 수도 있다

이 세계가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길은 없느냐? 없습니다. 세계가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환경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하늘을 중심한 사람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런 사람이 나오지 않고서는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세계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 개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심도라는 문제는 방대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온 세계를 통합한 가운데….

여러분이 제주도를 가 보면 알겠지만,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전지역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곳이 한라산 밑바닥이라 해도 그곳은 한라산 정상과 반드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각도는 다르더라도 정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평평한 것 같은데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높이가 가중되는 것입니다.

제주도가 한라산을 중심삼고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는 한사람의 인격자를 중심삼아 가지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인 모든 섭리의 뜻을 중심삼은 수고의 터전은 누구를 위해 있느냐? 세계를 위해 있기 전에 나 하나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터전이 넓어지고 높아진 것은 그것이 쪽 올라가서 높아진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수습해 가지고 하나의 높은 신앙의 인격을 구축하기 위해서 높아진 것입니다. 그런 정상에 서 있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 취하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사연이라는 것은 남의 사연이 아닙니다.

나와 직결되어 있는 사연입니다. 단계에 있어서는 나와 거리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직결된 사연이라는 것입니다. 단계에 있어서 거리가 있으니 나와 상관없다고 부정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큰 산을 이룰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인격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큰 인격 자가 될 수 없다고 할 때는 큰 뜻의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될 때, 사는 생활이 비록 제한된 환경에서 살고, 자기 하나 누울 수 없는 좁은 자리에서 사는 생활이라 살지라도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세계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의 정상의 자리에 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길을 자처해 간 자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 앞에서 염려한 것은 자기가 죽어 없어지는 것을 염려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죽더라도 그 인연을 남기고 가야겠다는 염려의 마음이 앞섰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4천년 역사를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의 사직(社稷)이 무너지느냐, 안 무너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심각했던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자기 일신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한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남겨진 전통의 노정이 나로 말미암아 손실이 돼서는 안 되겠다. 나로 말미암아 빛이 될 수 있는 결과를 가져 왔으면 가져 왔지 역사적인 하나의 한의 노정을 남겨서는 안 되겠다' 한 것입니다. 거기에 해방권을 만들고, 자유와 평등권을 만들고, 여기에 스스로 침의 원천을 자극시킬 수 있는 역사적인 그 무엇을 남기고 싶은 마음을 가졌으면 가졌지. 거기에 흠을 가져다 주고 거기에 손실을 가져다 주는 그런 놀음은 죽더라도 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길을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찾아 왔느냐? 그런 사람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역사적 가치의 내용을 종결지을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하나님은 심각할 것이 아니냐…. 이것이 더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되겠다는 심각한 마음, 그 상처를 남겨서는 안 되겠다는 간곡한 마음이 앞섰던 것입니다. 자기는 백, 천만한 상처를 입더라도 거기에 열만한 상처도 입혀 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보다 백배 천배 염려를 하면 할수록 그건 하늘의 영광이 되는 것이요, 하늘의 자랑이 되는 것이요, 하늘의 역사적 승리의 터전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자기 일신을 가누어 가지고 생각할 수 없는 자리가 아니었겠느냐? 그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는 자리가 아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는 공적인 입장에 선 당당한 그의 인격이 숨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러 시나이까'라고 한 것은 버릴 수 없으신 아버지이신데도 불구하고…. 여기 에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가 성경 가운데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의 내심을 중심삼고 볼 때, 그가 세상 앞에 말할 수 없는 간곡한 내적 결의를 다짐한 것을 두고 볼때, 그것은 '틀림없이 다 이루었다. 내가 소원하는 일념 앞에 있어서 넘을수 있는 고개는 다 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 한마디의 말은 역사를 새로이 창건할 수 있는 승리의 표어와 마찬가지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발전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 발전의 역사의 동기는 무엇이냐? 예수의 그 철저한 사상적 터전이었던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터전이 역사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고도 남을 수있는 동기의 기원이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죽음이 따르는 순교의 역사도 무한히 돌파하고, 현실에서 세계적인 터전을 넓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장본인이 가졌던 신념과 하나님을 위한 간곡한 심정적 심도가 거기에 깃들어 그것이 밑천이 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심어진 그 힘의 여력이 거기에 깃들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는 세계의 끝날에 거둬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4천년 역사시대를 대신해서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 진정한 의미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분이 간 죽음길은 보통 사람의 죽음길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기 일신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일개국의 행복뿐만 아니라, 만민과 더불어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시대의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가는 그의 심각함에는 그 누구도 따를수 없고, 하나님도 감탄하실 수밖에 없는 내용이 깃들어 있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루어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소원을 매듭짓고, 새로운 천국이념을 주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요구하는 뜻이라는 것을 생각 하게 될 때, 그러한 하나의 교차선, 그런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상에 서있는 오늘의 통일교회, 통일 종교를 갖출 수 있는 통일교단, 통일교단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신앙자, 그 신앙자의 인격은…. 그 인격이야말로 예수의 전통적 역사적 심정을 부끄러움 없이 상속받았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세계적인 수난 과정을 극복하고도 날올 수 있는, 승리의 한날을 찬양하고도 남을 수 있는 내적 결의와 더불어 다짐된 사람이 아니겠느냐. 이런 것을 두고볼 때 그자리에 선사람의 신앙의 심도라는 것은 은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