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집: 모든 존재물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존재한다 1959년 11월 29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127 Search Speeches

하나님과 예수님을 대한 믿음의 방법과 목적

우리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대신했던 예수님, 시대를 대신했던 예수님, 미래를 대신했던 예수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내용은 안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되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 미래적인 하나님을 믿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왔다 가신 이후 2천년 역사가 지났지만 역사적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누구뇨? 시간을 연하여 역사를 만들어 왔지만 역사적인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위로할 자가 없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위로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나는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하기 위하여 왔다'고 해명하고 싶었으나 그러한 해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해명하여 현실에 나타내야 되는데,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 환경이 못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지만 구약을 믿고 있는 유대교인들에게 가르쳐 주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예수님을 믿고, 더 나아가서는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가 땅 위에 제차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땅은 멸망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외적인 주권 형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6천년이 걸렸거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념을 찾아 세우기 위한 싸움이 몇 천년 걸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찾기 위한 싸움이 몇 천년 걸릴지 모르고 심정을 찾기 위한 싸움이 몇 천년 걸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최고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인연을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타락한 인간은 거꿀잡이로 올라가야 됩니다. 떨어졌으니 거꿀잡이로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고 타락의 혈통을 받아 떨어져 버렸으니 거꿀잡이로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복귀는 반대의 경로를 밟아갑니다.

여러분이 처음 은혜를 받으면 어떠합니까? 복중에 있던 어린애가 세상에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지의 세계가 보이고 광명한 새 천지를 보게 되니 기뻐합니다. 그런 역사를 지난 후에는 예수를 신랑으로 삼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보고 싶고 그리워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됩니다.

구약시대를 통하여 약속을 해 놓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셔서 이 온 세상을 마음대로 주관하셔야 했는데 그렇게 못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세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독생자의 권한이 어디 있습니까? 독생자의 권한을 가지고도 행사해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뇨? 신랑 신부를 갖추어 가지고 '아버지 축복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에덴동산의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입장에서 완성한 기준, 하늘이 기쁨으로 너는 내 아들 딸이라고 축복할 수 있는 그 기준을 복귀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자리에 못 갔다는 거예요. 처음 온 사람은 이해가 잘 안 갈 거예요. 아버지의 직접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못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왜? 신랑 신부를 갖추고 나타나야만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때를 바라보고 2천년 동안 기도하고 계십니다. 무슨 기도를 하시느뇨? '하늘이 나와 더불어 축복해 줄 수 있는 신부를 세워 주소서' 하는 기도를 하신다는 거예요.

신랑 신부를 세워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뇨? 그 신랑 신부가 하나님을 '아버지여' 하고 부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신랑의 아버지도 되고 신부의 아버지도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신랑으로 나타났으나 신부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신부가 나타나야 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부의 말씀이 나와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 땅 위의 인간들은 신랑되신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부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지 못하였기 때문에 필시 그럴 수 있는 신부가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합하여 둘이 머리를 숙이고 '아버님, 잃어버린 아들 딸 대신 찾아진 모습이오니 축복해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 들었어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만난 후 그 다음의 목적은 무엇이뇨? 예수님 붙들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그와 더불어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 해줄 줄 알아요? 예수님은 지금까지 사랑의 권한을 행사해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랑 신부의 권한은 끝날의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조건을 갖추기 전에는 신랑 신부로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가 불리울 수 있는 사람이 아직까지 인간 사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다 아버지를 못 모신 자식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양자인지 심부름꾼인지 종인지 알아요? 종이라도 그 주인이 슬퍼하면 눈물을 흘립니다. 양자라도 양부모가 억울하고 분한 일이 있으면 같이 울 것입니다. 신랑 신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떠한 입장인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는지 기뻐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심정을 통해야 됩니다.

역사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뇨? 어떤 진리가 아닙니다. 어떤 사상이 아니예요. 심정입니다. 역사의 배후에는 하늘의 6천년 심정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 땅 위에 실체와 더불어, 말씀과 더불어 나타날 때는 역사적인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럴 게 아니예요.

예수님을 믿는 목적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신랑 신부의 과정을 거쳐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잃어버렸던 참부모를 복귀해야 합니다. 인류의 참아버지 노릇을 해야 됩니다. 거꿀잡이로 갖다 맞추어야 합니다. 복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