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집: 해원성사 1971년 01월 03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06 Search Speeches

누가 나의 모친이" 동생이냐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생명을 내던지고 죽음길을 향하여 어떤 일이든지 주저하지 않는 무리를 형성하여, 그 권내에서 마리아가 책임하지 못한 모든 실수의 내용을 다시 수습하기 위한 노정이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마리아는 이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집을 떠난 뒤 처음 어머니를 만난 곳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역사를 한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집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 와서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 2:4)"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남의 잔치에 와 가지고 잔치 준비하면서 보고 느끼는 것이 없느냐? 아들이 서른이 넘었는데 천륜에 따라 가정을 갖도록 상대를 정해 주어야 할 본연의 책임을 상실해 버리고 남의 잔치집에 와서 포도주타령만 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꼴이요 한 것입니다.

이런 원통한 역사가 빚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와 가지고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찾나이다 할 때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이 누구뇨?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나의 모친이요 동생이다(마 12:48-50)'고 했습니다. 마리아와 동생들이 하나님 뜻대로 했습니까? 하나님 뜻대로 못 했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요셉과 마리아는 열두살된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요셉과 마리아는 수모와 역경 가운데서 천대를 받으며 자라나온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남겨 놓고 갔다가 사흘 후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거리는 삼백리가 넘습니다. 그런데 어떤 어머니가 역사적인 한을 품고 길러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예루살렘에 남겨 놓고 사흘길을 그냥 따라가겠습니까? 그런 어머니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돌아가려는 순간 예수님이 없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자기 집안에 문제가 벌어지고 예수님이 불화의 화근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서 데려가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요셉의 눈치를 보며 모르는 체 떨어뜨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따라가는 마리아의 에이는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집에 가는 도중에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동네에 소문이 날 것 같아 할수없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찾아 성전에 가보니 예수는 제사장, 교법사들과 성경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를 보고 여기서 뭘 하느냐 할 때,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고 말했습니다. 반발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의 안개 속에 흘러간 예수님의 슬픈 사정을 그 누가 알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가 있어도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 없었고, 아버지가 있어도 품에 안길 수 없는 의붓 아버지요, 형제가 있어도 의붓 형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늘 왕자로 와 가지고 누구보다도 사랑을 받아야 할 입장이었는데 요셉 가정에서 이렇게 엇갈리는 입장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소문이 이스라엘 전역에 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나라의 강원도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니 소문이 안 퍼지겠습니까? 그렇게 소문이 퍼지게 되니 예수님은 어디를 가나 유대교의 반대를 받고 이스라엘 나라의 반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셔서 이스라엘 나라의 중심적인 혈족으로 요셉 가정을 세워 그 터전 위에 예수님을 중심적인 존재로 보냈지만 그들이 책임 못함으로 말미암아 나라를 잃어버린 예수, 민족을 잃어버린 예수, 교회를 잃어버린 예수, 친척을 잃어버린 예수, 부모를 잃어버린 예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이루어 드려야 할 기반까지 완전히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디 가서 그 기반을 닦을 것이뇨? 그 기반을 닦기 위해 무지몽매한 사람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중심삼고 수고했던 예수님의 내적 고심이 얼마나 컸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밀밭 사이로 가다가 배가 고파서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기도 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할수없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은 이러한 것들이 선동적인 요인이 되어 가지고 국가의 반역자, 민족의 반역자의 누명을 쓰고 비운의 십자가노정을 걸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