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집: 성탄일을 맞이할 사명 1966년 12월 25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12 Search Speeches

뜻을 펴지 못하고 외로운 생을 살다가 간 예수

오늘날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진정한 축하를 할 수 있고 진정한 송영을 할 수 있는 첫노래를 불러 하늘 앞에 화답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날 때뿐만이 아닙니다. 날 때까지 하나님의 위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돼요. 날 때도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장면을 우리들이 이루어 드려야 되고 낳아 가지고는 예수가 기뻐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30여 생애 가운데 그의 주위에서 그를 시봉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가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모습을 고대했고, 당신의 심정의 위안처를 찾기를 바랐던 하나님은 도리어 예수를 보내 놓고 서글픔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로 말미암은 제1차적인 서글픔보다도 예수로 말미암은 제2차적인 서글픔이 더 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태어나던 그 순간에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 못한 사람들의 후손된 우리는 그날을 탕감복귀해야 되겠습니다. 고이 아버지 앞에 나아가 '그런 역사적인 우리 선조들에 의해 당신의 가슴에 슬픈 심정의 못이 박혀 있는 것을 푸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날을 맞기 위해 비로소 흰옷을 새로 해 가지고, 아버지 앞에 모실 때 입어야 했으나 잃어버렸던 그 옷을, 더럽혀졌던 그 옷을 다시 빨아 가지고, 첫 번 입지 못하고 더럽혀진 옷을 빨아 입고 아버지 앞에 나와서 다시 아버지의 뜻을 받아, 하늘의 왕자를 대해야 할 신세인 것을 서글퍼하면서 맞이해야 할 시간이 이 시간인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태어나면서까지 하늘의 서러움을 남긴 예수, 이 땅 위에서 30여 생애를 지내면서의 예수, 그는 얼마나 외로웠던가! 그는 4천 년 역사를 부활시켜야 할 하늘의 책임자요, 피폐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사명을 짊어진 메시아인데도 불구하고 환경적인 어려움을 타개할 내적인 고충과 시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적인 고충을 누구한테도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자주독립국이 아닌 식민지였기 때문에 하늘이 원하는 뜻을 입을 갖고 있으되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자기 부모한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묵묵히 밤이면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내적으로 속삭이고, 낮이면 쉬는 시간에는 뜰 앞에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보면서 말하던 예수였습니다. 스쳐 가는 바람결과 더불어 친구했고, 지나가며 우는 새와 더불어 친구하기를 일삼던 예수였습니다.

그는 이 땅에 왔지만 친척도 없었습니다. 친척 같은 패는 많았지만 친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에 갔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하늘의 말씀을 나누고 있을 때, 그의 부모들은 하룻길을 갔다가 예수가 없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선 것을 보라구요. 그런 것을 보게 될 때에 그들은 예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을 안 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메시아의 소견과 일치될 수 있는 환경적인 종족이 없었던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그는 홀로 아버지 앞에 호소할 적마다 숨은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의 책임을 다짐해야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내적인 생활을 쌓아 나왔던 예수였습니다. 예수의 그런 시대를 생각해 볼 때, 그런 생활환경에 있어서 친구가 되고 혹은 유모가 되고, 그 마음의 위안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또 그 억센 환경을 실날 같은 어린 몸을 가지고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책임적인 분야를 염려하면서 눈물로써 품어 주고, 자는 그의 외로운 모습을 보고 하늘 앞에 눈물로써 기도하던 한 사람이 있었느냐? 이 얼마나 원통합니까?

남과 같이 입고 싶은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으로 만족할 분이 아닙니다. 이념적인 심정을 통하여 하늘을 등에 지고 땅 위에서 예수를 품고 그 장래를 염려하면서, 부디부디 고이 자라서 이 민족을 해방하고 세계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 줄 수 있는 협조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그때의 제사장들을 하나님이 볼 때 전부 한꺼번에 모가지를 잘라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혼자 말없이 쓰러져 입은 채로 자고, 먹는 대로 먹고, 그 주변에서 보호하는 사람도 없는 생활을 한 예수를 나는 알아요. 나는 잘 압니다. 그런 사연을 갖고 있으니….

이런 날을 맞이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내 가슴이 막힙니다. 남 모르는 세상에 남이 알지 못하는 뜻을 품고 왔다 간 그 외로운 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모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후손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니…. 예수의 사연이 그랬다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뭘할 것이냐? 예수가 바라보던 그 나라, 바라보던 그 세계, 이스라엘 문화가 로마제국을 항복시키고 하늘의 창국의 이념과 더불어 승리의 개가를 아버지 앞에 돌릴 수 있는 그날을 꿈에서나 깨어서나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그가 보고 느끼는 오관을 통하여서 그날을 고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수고하여 세운 이스라엘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 섭리인 것을 알게 될 때, 무지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들이 잠을 자는 그 시간에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책임을 짊어지고 홀로 헤매던 예수의 배후의 생애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것이 도리어 복입니다. 그걸 안다면 여러분은 밥을 먹고 살지 못합니다. 옷을 입고 살지 못하게 됩니다. 네 활개를 펴고 잠을 잘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