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집: 미처 몰랐습니다 1972년 08월 20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36 Search Speeches

"민족의 숙원인 통일방안, 통일의 사상적 기틀을 남겨 "고 가자"

공산주의는 유물사상이라구요. 알겠어요? 공산주의는 유물사상입니다. 죽으면 다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통일사상은 내가 뜻을 못 이루게 되면 죽어서라도 가서 싸워야 된다는 거예요. 이런 면에서 한 가지 낫지요. 그런 사상이 아니고는 이길 가망성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지요.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선생님이 뭘 하자고 하면, '아이구 또 뭘 하라고 그러나' 이러지요. 우리 통일교회 무슨 단체의 책임자들, 그 이상의 책임을 느끼면서 가야 됩니다. 가라구, 이놈의 자식들! 변명할 사람이 많겠지만…. '아. 선생님 기다렸습니다. 그 아침이, 그 낮이. 그 저녁이, 그 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라고 하며 몇십 배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남한에 있으면, 북한 사람은 그러지 못하는데 남한 백성이 그러고 있으면 북한을 소화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맞아요, 안 맞아요? 틀려요?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한 것이 뭐냐? 공산당들을 눈앞에 놓고 '누가 노동자 농민을 더 사랑했느냐? 자, 터놓고 이야기해 보자. 백성을 들어 거국적으로 알아 보자' 할 때에 이야기할 재료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재료를 남겨야 됩니다. 준비를 해야 됩니다. 지금 그것이 필요한 때가 왔다구요.

'3년이 미급하거들랑 10년 세월을 붙들자. 10년이 미급하거들랑 20년을, 내 청춘이 미급하거든 내 장년, 내 생애를 바쳐서 붙들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방안, 통일의 사상적 기틀을 남겨 놓고 가자. 이것이 우리 민족의 소원이 아니냐? 남이야 알아주든 몰라주든 우리는 가자!' 이것이 통일의 길이 아니었습니까? 통일의 사상은 거기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통일사상이 가는 곳에서는 공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운동을 제시해야 되겠습니다. 현지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어려움도 그 눈을 넓혀 가지고 바라보고 오라고 울부짖을 수 있는 사나이의 무리를 만들어 보자고 하는 것이 통일사상이 아니냐?

그 일을 여기에 있는 문이라는 사람을 중심삼고 시작한다면 패할 가망성이 있지만, 하나님을 동기로 삼고 그런 과정을 거쳐간다면 망할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망하더라도 이 뜻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는 것이 통일교회 문선생의 소신입니다.

우리는 민족이 이렇게 갈라질 줄 미처 몰랐습니다. 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요? 그러다가 이렇게 통일의 운세가 터 오게 될 줄 또한 미처 몰랐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미처 모른 배후에 어떠한 해결방안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처 몰랐다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적용되는 거예요. 이 땅에 왔다가 삼십 당년을 중심삼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필생에 한을 남기고 갔던 예수, 그가 인류의 조상으로 왔던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가 사랑의 남성으로서 사랑하고 싶었던 사랑의 대상. 여성을 사랑해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해보지 못한 것이 얼마나 한이 됐다는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와 가지고 가정을 이루어 종족을 치리하고 나라를 치리하고 세계를 거느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야 할 것인데, 그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게 전부 한이라고요.

6천년 역사시대를 두고 볼 때에, 아담 가정에서 타락된 동기가 무엇인지를 미처 몰랐습니다. 노아가 실패한 동기가 이것인 줄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이 드린 제물 하나가 이렇게 역사적인 한의 거울이 된 줄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모세의 실수가 그렇게 역사적 반역을 일으킨 원한의 터전이 된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세례 요한의 실패를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예수가 간 십자가의 길이 어떻다는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기독교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우리는 몰랐던 사실을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는 여러분들이 미처 그것도 모르고 간 그 사람들보다도 못해 가지고 세계 역사시대의 주인이 되고, 심판을 주도할 수 있는 책임자가 될 수 있겠느냐? 어림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보다도 나아야 할 것 아녜요? 아브라함을 대해 가지고 아브라함의 훌륭함을 찬양하는 것보다도 '아브라함이여, 그대는 훌륭했지만 요 부분은 미처 생각지 못했지 않았느냐? 당신은 미처 몰랐지 않았느냐?'고 교시하여야만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여, 당신은 요 점을 미처 모르지 않았느냐?'고 교시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대해서 '당신은 이것을 미처 모르지 않았느냐? 예수님을 대해서 '이러이러한 작전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이렇게 진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앞에 그런 제자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가 그렇게 죽은 거예요. 그렇게 진언할 수 있는 제자를 맞을 수 있어야만 예수가 해원성사 할 수 있는 거예요. 예수 당대에 그런 제자가 있었으면 예수는 성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염려하고 갈 길을 위해 염려하고 진언할 수 있는 제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 가지고 십자가에 죽을 것을 예고하니까 베드로가 '선생님이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하자 예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죽게 됐는데 자다가 지금 와서 무슨 수작이야, 이녀석아! 보따리를 이미 싸놓았는데, 이미 결의하고 이미 결심하고, 다 작정한 일인데 이제 와서 그것까지 방해하느냐? 이 겁장이 녀석아' 그런 역사를 모르는 무리나 혹은 동료들간의 동급의 자리에서는 역사를 수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리란 것을 미처 모르지 않았습니까?'라고 교시할 때에, 역사의 부활은 벌어지는 거라구요. 알겠어요? 실패의 역사가 승리의 역사로 되는 부활권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할 것이냐? 이는 심각한 문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