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집: 하나님의 심정권을 상속하는 길 1988년 02월 21일, 한국 한남동 공관 Page #288 Search Speeches

타락한 인간을 본-의 인간으로 교체해 나온 하나님의 섭리

결혼을 왜 하느냐? 아담 해와가 스스로의 사랑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예요. 종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핵으로 하여, 그 핵을 중심삼고 부체(附體)로서 하나의 구형을 이루기 위한 거예요. 그것이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도 그러한 사랑을 중심삼고 결착되는 것이고, 인간 남자 여자도 성숙해 가지고 거기에서 사랑의 결착점이 벌어지고 생명이 연결되는 거예요. 그러니 생명으로 말미암아 연결되는 것이 아니예요. 사랑으로 말미암아 연결되는 겁니다. 종적 아버지의 사랑과 횡적 부부의 사랑을 중심삼고 본연의 사랑의 씨가 비로소 연결되는 거라구요.

그래 생명이 먼저냐 사랑이 먼저냐 할 때, 생명이 먼저가 아니예요. 사랑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얘기했지만 사랑이 먼저예요, 사랑이.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걸 생각해야 됩니다. 탕감복귀니만큼, 사탄세계에서 태어났으니 사탄의 혈통을 끊어야 돼요. 이것은 세계적인 아벨을 중심삼아야 하는데, 세계적인 아벨이 누구냐 하면 복귀된 아담을 말하는 거예요. 복귀된 아담의 자리라는 것은 세례 요한의 자리라구요. 메시아 앞의 세례 요한의 자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 자리를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돼야 되는 거예요.

복귀된 아담과 본연의 아담은 뿌리가 다르다는 거예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뿌리가 달라요. 예수님이 태어나기를 어떻게 태어났느냐 하면, 가인과 아벨 형제로부터 좁혀 들어간 거예요. 좁혀 들어가서 쌍동이로 찾아들어간 것입니다. 어디로? 본연의 기원지로 찾아들어간 것입니다. 장발(성장)해 가지고 탕감의 역사를 한 것이 가인과 아벨을 중심한 탕감의 역사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동이입니다. 쌍동이 시대, 둘째번에 가서 거기서 비로소 복귀한 거예요. 비로소 차자가 장자권을 복귀한 것입니다. 장자권을 사는 거예요. 사는 걸 중심으로 완전히 그걸 빼앗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어떻게 되느냐? 암만 빼앗아 교체가 됐다 하더라도 사탄의 혈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말을 중심삼고 베레스와 세라 문제가 나온다구요. 복중에서 바꿔치는 것입니다. 형제를 바꿔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근본을 바꿔쳐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형님 세라가 나오려 할 때 베레스가 밀치고 나왔다구요. `베레스'라는 말은 밀치고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래 홍실을 맨 것은 가인세계의 전형인 공산주의가 나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탄 패가 먼저 나와 가지고 지배하려는 형태가 벌어진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서 밀치고 차자의 자리에서 장자의 자리에 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계적이 아니었어요. 소생·장성·완성으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의 야곱가정을 중심삼고 그 일이 벌어졌지만, 그것은 국가적 기준이 아니었어요. 사탄은 국가기준이 돼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기다려서, 예수님 시대까지 2천 년을 기다려 가지고 요셉가정을 중심삼고, 마리아와 요셉의 문제를 중심삼고 조건을 세워 가지고 예수가 잉태된 것입니다.

심정적으로 복중에서 장자의 기원을 세웠던 것을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권 종족시대를 중심삼고 마리아 시대에 와서, 다말이 세웠던 전통적 태중 복귀적 기반을 국가적 차원에서, 가정적 차원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이스라엘 전통을 터로 이어받아 가지고 거기서 비로소 예수님이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 와 가지고는 사탄이 복중에서 참소할 수 없다는 거예요. 복중에 잉태됐지만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예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들로서 승리적 아들권을 중심삼고 그 일이 시작돼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가 다른 것이 그거예요, 예수님이 다른 것이. 태어나기를 사탄세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역사적으로 혈통을 맑혀 가지고, 복중에서 태어날 때부터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자리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게 다른 거예요. 세례 요한이나 다른 모든 성인들은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권내에서 싸워 가지고 성별된 기준을 지어 나갔지만, 예수는 복중에서부터 사탄이 참소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됩니다. 그건 제사장직에 있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임재해 가지고 역사한 사람이라고 봐야 되는 거예요. 흥진군이 역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구요. 그 뿌리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다른 뿌리에서 예수님이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중심삼고 접붙이게 될 때 그것은 돌감람나무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이 기독교 역사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