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집: 승리적 주관자가 되라 1965년 01월 01일, 한국 전본부교회 Page #253 Search Speeches

세 번 이상의 시련 기간

오늘날 하나님은 참 무자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줄 사람이 생겨나야만 천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은 1대로만 섭리하지 않고 3대 이내로 섭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 해와만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아들을 찾아 세워 3수를 맞추어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주체이면 그 다음엔 반드시 3수를 거치는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쳐 줘도 중요한 문제는 3수를 통해서 가르쳐 줍니다. 3수를 통해서 가르쳐 주는 것을 잘 믿으면 내 것이 됩니다. 잘 수습하면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중심하고 볼 때에 하늘과 땅이 있으면 반드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천지와 사람이 있는 것처럼 삼위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하나 가지고는 안 됩니다. 3수를 세워 가지고야 됩니다. 나를 찾아야 할 때는 반드시 내 후손, 내가 땅 위에 연결지을 수 있는 후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딸을 잘 키우면 그때 가서야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키워 가지고 잘 자라면 그때서야 천리를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복귀역사를 그렇게 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키워 준 만큼 한 생명을 위해 정성을 들이고 몸부림치게 될 때에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밤잠을 잘 수 없으리만큼 식구를 그리워해야 됩니다. 슬픔이란 외부의 환난에 의해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외로운 것도 슬픈 것입니다. 뜻을 알았지만 그것을 자랑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슬픔입니다. 외적인 고통과 환난에 의한 슬픔도 슬픔이려니와, 내적인 고독이나 뜻을 전달해야 할 상대가 없을 때도 슬픔이 뒤넘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 있다 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자신의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고통을 받더라도 자녀들을 중요시하고 책임진 환경을 중요시하고, 또 그것을 자기가 수습하겠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나아갈 때에 한 고개를 넘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결정지을 때는 반드시 가인 아벨을 세워 가지고 합니다. 가인을 통해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 슬픔도, 고통도, 죽음의 길도 자기가 개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끝까지 참고 개척해 넘어가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여 승리의 기대를 세워 놓고 성신을 보냈습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출발을 해 가지고 기독교를 세워 세계적인 출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역사를 계속해 나오셨습니다. 그런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은 무정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도 확실히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갖고 슬픔의 길도, 고통의 길도, 죽음의 길도 각오하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적어도 세 번 이상 죽음을 각오해야 됩니다. 죽음의 자리를 세번 이상 넘어가야 됩니다. 그러한 자리를 거쳐 가지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실체가 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대할 수 있는 승리적인 주관자의 자리에 나가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슬픔과 고통과 죽음의 길에서도 승리적 주관권을 갖출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가야 되겠습니다. 선생님도 이 길을 출발할 때에 죽음을 몇백 번 각오했습니다. 그러한 시련 기간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명령하는 그런 훈련 기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적인 죽음의 고개와 민족적인 고통의 고개와 민족적인 슬픔의 고개를 넘고, 세계적인 죽음의 환난과 세계적인 고통의 환난, 세계적인 슬픔의 환난을 당해 보아야만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땅이 슬퍼하고 하늘땅이 생사의 기로에서 몸부림칠 때, 이것을 해결지어 가지고 승리의 일로를 개척해야 하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하늘땅의 죽음의 길, 슬픔의 길, 고통의 길에서 뒤넘이치다가 한 면, 즉 영적인 면만 해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길을 다시 가야 할 복귀도상에 있어서, 오시는 주님은 반드시 양면의 책임을 감당해야 되겠기에 영광중에 못 나타납니다. 제일 슬픈 자리에서 눈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눈물로 다짐하고, 고통의 생활을 거쳐 죽음의 길을 왕래하면서 복귀의 길을 개척해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슬픈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원과 사랑을 품고, 고통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소원과 사랑을 품고, 죽음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소원과 사랑을 품고 그 실체로써 나타날 수 있는 실력을 맞추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최후에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완성하는 소망의 주관자, 혹은 사랑의 주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