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집: 복귀와 축복 1969년 02월 02일, 일본 동경교회 Page #195 Search Speeches

탕감복귀의 결과

선생님은 예수님이 유대교에게 반대를 받은 것과 같이 기성교회의 반대를 받았다. 그래서 선생님은 사탄진영의 한가운데 들어가서 그들과 싸워, 원상으로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서고 말았기 때문에 쫓기고 몰리는 몸이 되어 원수의 본거지인 북한의 평양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나님이 축복하여 지금까지 기반을 만들어 두었던 서울을 뒤로 하고 원수의 본거지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서 싸우고 또 싸워서 참소조건을 제거하고 넘어오지 않으면 제2의 출발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선생님이 공산권에서 걸은 옥중노정이다.

옥중생활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쫓기고 제자들이 반대했던 입장을 탕감복귀해야 했다. 선생님은 그 감옥생활에서도 영계가 협조하여 12명의 제자를 전도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가 출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남쪽으로 내려오자 새롭게 기성교회가 반대했지만 물리쳤다. 선생님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온갖 교파, 즉 분열된 모든 기독교를 홀로 결합시키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였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그들에게 비견(比肩)할 수있는 새로운 교파권을 만들어 나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여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것이 한국에서의 통일교회, 즉 통일교단인 것이다.

1968년 9월에 크리스챤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기성교회와 정식으로 대화하게 되었다. 그때에는 기성교회의 박사 등 통일교회의 선생님에 대해서 반대하였던 우두머리들 약 40명이 참석하였다.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 당당히 들어갈 때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었다.

우리들은 벌써 시기적으로 보아 이러한 때를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사람들은 몇년 전부터 자기들 마음대로 반대하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볼 때 훅 불면 날아갈 것 같고 보잘것없이 보였던 모습이었지만 때가 바뀌고 시절이 지나고 보니까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던 그런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을 대해 동정의 마음을 갖고 나타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 사람들이 선생님을 맞이하여 통일교회의 진리를 추거(推擧)할 수 있게 된 것은, 요컨대 머리를 숙이는 것과 같은 단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과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왔다. `통일교회가 제일 무섭다. 문선생은 스탈린 이상 가는 사람이다. 기독교에서도 손을 댈 수가 없다. 이론적으로 도무지 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상대하지 말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오합지졸같이 와글와글 떠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