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집: 복귀섭리의 원칙 1964년 04월 07일, 한국 춘천교회 Page #90 Search Speeches

복귀섭리를 하려면 소원일치·사정일치·심정일치가 돼야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상대될 사람은 예수와 소원일치, 사정일치, 심정일치가 되어야 됩니다. 사람이 하나되려면 뜻이 같아야 돼요. 그렇지요? 또, 생활하려면 사정이 통해야 돼요. 그다음에는 심정이 통해야 돼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 '너와 떨어지면 못산다. 떨어지면 안 된다. 가지 마라!' 하고 영원히 놓을 수 없는 그런 인연이 되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소원일치, 사정일치, 심정일치!

그래 통일교회 교인들, 우리 식구라 하면 사정이 같아요. 소원이 같아요. 심정에서는 형제요, 한 부모의 아들딸이예요. 이 세 가지가 일치되어야 한단 말이예요. 그래서 신부를 모셔 가지고….

최순덕! 고마운 얘기 해서 기도하나? '선생님, 참진리의 말씀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거야? 기도하는 것은 괜찮지만 기도하는 종류가 좀 다를 텐데? 잘 들어 두라구요. 어디에 가도 이런 이야기는 안 가르쳐 줘요. 선생님이 휙― 가게 되면 여러분들 언제 또 만날지 알아요? 형편이 없는 이 인간들. 오늘날 타락한 여러분들은 원수 종새끼로 취급받고 있어요. 그런데 하늘이 있어서 그런 여러분을 살려줄 수 있는 말씀을 해주시니 고맙다는 거예요. 종의 이름이 붙어 있는 여러분에게서 원수의 철망을 벗겨 주는 사람이 있다면 천년 만년이 지나도 그 은덕을 못 잊는 거라구요.

선생님이 옛날에 감옥에서 사형수하고도 함께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팔을 베고 잠도 자고 그랬어요. 선생님이 그때 '이 사람아, 자네는 무엇을 해먹다가 여기 들어와 가지고 이따위 놀음을 하다가 죽을 날을 기다리는가?'라고 물으면서 테스트를 많이 해봤어요. 그들은 밤에 자다가도 두 시, 세 시면 그저 공상을 하다가 '후유―' 하고 한숨을 쉬는 거예요. 생명의 애착, 생애의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요. 옛날 죄를 짓기 전에는 생명이 그렇게 귀한 줄 몰랐지요. 죽음의 경각에 임하게 되니 '아이쿠머니야! 생명이 이렇게 귀하구나'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예요. 죽을 시간이 되면 '아이쿠! 내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거예요. 그때 가서야 비로소 생명의 가치를 아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미욱한 녀석들도 그저 일어서지 못하고 죽을 고비를 왔다갔다하는 병을 한 서너 번만 앓아 보면 도의 길을 안 갈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병도 가만히 보면 하늘이 구원섭리를 위하여 인간에게 선물로 준 것 같아요. 따지고 보면 그렇다구요. (웃음)

병자는 악한 마음을 품을 수 없는 거예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악한 마음을 품을 수 없는 거예요. 병자는 자연을 대하더라도 동정을 받고 싶고, 하늘땅을 보아도 동정받고 싶어하는 거예요.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봤으면 하고 기대하는 거예요. '내가 건강해져서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하고 말이예요. 건강한 사람을 봐도 동정받고 싶고,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 동정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병자는 악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게 수양이예요. 한번 앓아 봐요, 그런가 안 그런가.

그렇기 때문에 병이 나쁜 게 아니예요. 그 사람이 죽을 자리를 거쳤지만 본연의 사람을 찾아오면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 앓으라는 건 아니예요. 앓지 말고 다 복받을 수 있는 길을 찾자구요.

그러니까 오늘날 여지없이 불쌍한 우리 인간들 앞에 하나님이 살려주겠다는 말만 해줘도 고마울 텐데 아까도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이런 사형수들 앞에….

내가 그 사형수에게 한번은 '이 사람아 내가 살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줄 테니 내 말 들을 건가?' 해봤어요. 그랬더니 '아, 해봐요' 하더라구요. 무슨 짓이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어요. 술잔에 술을 가득히 부으면, 찰랑찰랑 넘칠 듯 부으면 이것이 부착력이 있어서 잔 높이보다 조금 더 올라온다구요, 넘지 않고. '그렇게 가득히 부어 가지고 네 손바닥에 탁 올려놓고 서울 시내를 일주하는 데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돌아오면 살려준다 하면 할래?' 그랬더니 '하고 말고!' 하고 서슴지 않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사는 것이 그리울까?' 하고 생각했어요. 난 그거 모르겠어요. '얼마나 간절할까?' 그 경지는 모르겠다구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이 제정한 형법 조건에 걸려 가지고 죽음의 날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정력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인간 스스로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연 형법 조건에 걸려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있는 거예요. 자연 형법이 뭐예요? 자연 형법에 의하여 사형선고 받은 날짜는 기다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죽을 날 기다려 봤어요? (녹음상태 불량으로 일부 수록하지 못함)

이 자연 형법에 의하여 사형언도를 받은 죽음의 길을 돌파하기 위해서 생의 애착감을 가진 사람은…. 자연 형법에 의해서 사형선고를 받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거기에 대한 생의 애착감을 느끼면서 다시 살길이 없겠느냐고 찾아 나서야 할 길이 하늘이 주장하는…. 그래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면 얼마나 고마운지 더 말할 게 없을 거예요. 그렇겠지요? 「예」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어떻다구요? 원수의 종새끼도 못 되는 위치에서 원수의 입장으로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가요? 지옥에다가 쳐넣는다는 거예요, ‘이 자식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