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집: 입적을 위하여 본향 땅으로 돌아가자 1988년 05월 22일, 한국 본부교회 Page #328 Search Speeches

하나님은 사'의 구형의 핵의 자리- 계"

그러면 여러분, 아까 말했지만 왜 아들이 되는 걸 원해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왜…? 그걸 알아야 돼요. 가르쳐 줄께요. 아들이라는 것은, 물론 딸도…. 딸보다도 아들이 필요한 거예요. 왜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그래요? 나라는 존재는, 여러분이라는 존재는 부모님의 사랑에 동참한 존재입니다. 생각해 보라구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내가 왜 귀하냐? 부모님의 사랑의 동반자요, 동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나를 절대 뺄 수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왜 아들딸을 놔두고는 못 사느냐 이거예요. 사랑을 놓고는 못 사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아들딸은 자기의 사랑의 동참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 끼이더라도, 어머니 아버지 둘이 붙안고 사는데 큰 딸이 와 끼더라도 기분 나쁘지 않다는 겁니다. 그거 한번 해보라구요.

그러면 엄마 아빠가 딸하고 사위가 사랑하는 걸 보고 시기해요? 기뻐해야 되겠어요, 시기해야 되겠어요? 「기뻐해야 됩니다」 왜? 동참적 사랑이 이상적으로 확대되는 자리는 모든 존재물의 바람(所望)이기 때문입니다. 부모하고 같은 방에서 아들하고 며느리가 사랑한다고 해서 부모가 성을 내고 자식이 부끄러워해야 될 일이예요, 안 될 일이예요? 시아버지 방에서 며느리가 아들하고 사랑할 때에 그 며느리가 싫다고 하겠어요, 좋다고 하겠어요? 어디 한국 여자들, 남편이 그런다면 `아이고, 이 미친 남자' 이럴 게 아니예요? 본연의 사랑의 싹이 트면 다 가린다는 거예요. 그렇게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억천만 년의 부끄러움을 극복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벌거벗은 노아를 보고 부끄러워한 것을 저주했는데, 그게 어떠한 원칙에서냐? 본연의 사랑은 그것을 포괄하고도 남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불륜의 사랑의 인습적 습관성이 함을 지배하여 사탄의 꼬리를 박을 수 있는 것을 자동적으로 시인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아들딸이 뭐라구요? 자녀의 특권을 찾았어요, 이제는. 이런 원칙이 있었어요. 자녀의 특권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원하게 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사랑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의 동참권에 있어야 되고, 동위권에 있어야 되고, 서로 나눠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내가 받는 사랑을 어머니 아버지가 시기하지 않습니다. 안 그래요?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아들딸이 시기하지 않아요. `어머니 아버지, 우리 부부보다 더 사랑하소' 하는 아들딸이 효자 효녀더라 이겁니다. 「아멘」 효자 효녀를 어디서 찾아낼 거예요? 이 원칙에 의해서 찾아내는 거예요.

아버지가 80노인으로 혼자 사는데 70노인 할머니를 어머니로 모셔다 아버지에게 붙여 줬다고 할 때에, 그 아들이 뚜쟁이 입장에 섰지만 뚜쟁이라고 그래요? 「효자라고 합니다」 강제로 끌어다가 붙여 줬더라도, 효자라고 하고, 할머니는 `고마운지고' 하면서 고마워합니다. 성내겠나요, 고맙다고 하겠나요? 「고맙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하―!' 하는 거예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좋지, 아들 사랑하는 것보다 더 높은 사랑을 해야 되겠구나' 한다구요.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제 그만하면 알겠어요?

그래 무엇이 하나를 만들 수 있느냐? 돈이 아닙니다. 시아버지 쌈지에 억만 원짜리 수표가 하나 있으면 며느리는 밤잠 못 자며 그것을 빼앗아 갖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그건 불안하다구요. 그러나 사랑은, 골수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는 것은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랑 봤어요? 그거 아무나 알게 된다면 이웃 동네 아주머니의 깊은 사랑 주머니가 크고 훌륭하다면 도둑놈이 밤낮 찾아가겠어요, 안 찾아가겠어요? 그거 막을 무슨 비법이 있어요? 사고 중에 그런 사고가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안 보이길 잘한 겁니다.

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 사랑의 사람들이 마음대로 건드릴 수 있는 하나님도 사랑의 사람들 눈에도 보다 안 보일수록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 취하는 사람들도 볼 수 없는 자리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적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수평선은 바라봐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하면 높은 곳에 계십니다. 위를 바라보면, 피곤해요, 안 피곤해요? 「피곤합니다」 하나님은 제왕이기 때문에 도적놈 사촌들이 득실득실한데 수평선 저 끝, 영원히 바라보더라도 좋고 지장이 없는 시선권 내에 있겠소, 조금 바라보면 모가지가 아파 싫다고 도망갈 수 있는 데에 있겠소? 도망갈 수 있는 높은 곳, 모를 자리에 하나님은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횡적으로 딱 붙들고 하나된 자리에서 서서도 볼 수 있고, 누워서도 볼 수 있고, 앉아서도 볼 수 있고, 엎드려서도 볼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일 것이냐? 그런 문제가 문제됩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손 닿을 수 없는 자리에 있어야 되겠어요, 손 닿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되겠어요? 「손 닿는 자리에요」 문총재 사모님이 문총재 손에 닿을 수 있는 데에 있어야 되겠어요, 손 닿을 수 없는 데에 있어야 되겠어요? 「손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됩니다」 알긴 아누만. 손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됩니다.

안는 데는 꽉 안아야 되겠어요, 허술하게 안아야 되겠어요? 「꽉 안아야 됩니다」 한 고비만 안았으면 이 손이 두 고비 세 고비 네 고비 꽉 안고 싶은가요, 한 고비만 안고 그만두고 싶은가요? 한 고비만 안고 그만두고 싶은 사랑을 원해요, 네 고비 다섯 고비 `아이구우, 욱!' 하고 꼭 안아 가지고 숨이 막힐 만큼 안아 주길 원해요? 「숨이 막힐 만큼요」 허리가 딱 잘라지도록 그저 들입다 조여 주는 자리의 사랑을 하고 싶은 겁니다. 아이고, 내가 기운이 빠지누만. 얼마나 힘을 줬는지. (웃음) 이렇게 열심히 하니까 열심히 배워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아멘」 그럴 거예요? 어디, 그러겠다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소. 아이고, 고맙구만. 두 시간 얘기한 보람이 있는데? (웃음)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 동서남북, 저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도 잡을 수 있고, 저 위에 있는 사람도 잡을 수 있고, 아래에 있는 사람도 잡을 수 있어야지. 사랑하는 것들의 불쌍한 모습을 어떻게 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은 구형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구형의 핵의 자리에 있어야 된다 하는 이런 정당한 논리를 설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똑똑히 알았어요? 「예」